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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12 수많은 희생 끝에 탄생한 ‘미터법’

수많은 희생 끝에 탄생한 ‘미터법’

1999년 9월, 화성 궤도에 진입하던 미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Mars Climate Orbiter)’이 대기와 마찰을 일으켜 파괴됐다. 이 탐사선을 제작했던 미국 기업 록히드 마틴은 야드파운드법을 기준으로 제작했는데, 탐사선을 실제로 운용한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계기에 표시된 숫자들을 미터법 단위로 이해해 조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추진력 수치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탐사선은 화성에서 예정보다 100km 아래인 60km 지점의 낮은 궤도에 진입하다가 사고가 발생했다.

미국에서 캐나다로 넘어가는 국경지대에서는 과속으로 인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 미국의 속도 단위는 마일(mil)이고 캐나다의 속도 단위는 킬로미터(km)로 다른데, 미국에서 달리던 속도를 유지하며 캐나다로 들어서면 무심코 과속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는 단위들. 그런데 국가별로 다르게 사용되는 단위들로 인해 자칫 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단위의 통일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중 길이를 재는 단위, 미터(meter)는 현재 미국, 미얀마, 라이베리아를 제외한 전 세계 모든 국가에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미터법이 제정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미터법은 1799년 12월 10일, 프랑스에서 도입됐다. ‘미터’라는 용어의 어원은 ‘잰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메트론(metron) 혹은 라틴어 메트룸(metrum)에서 유래됐다. 자유, 평등, 박애를 인류의 보편정신으로 부르짖으며 프랑스혁명을 이끌어낸 18세기말 프랑스 계몽사상가들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아우르는 척도(尺度)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혁명적 대의뿐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곤란했던 것이 앙시앙 레짐(구체제) 하의 프랑스에서는 약 800개의 이름으로 25만개나 되는 도량단위가 쓰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량형의 통일이란 정치적 혁명만큼이나 중차대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고, 엄청난 저항을 극복해야하는 일이기에 선뜻 손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고, 여러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개선됨으로써 과학자들은 다양한 양들에 대한 정밀한 측정을 시도하고 있었다. 과학이 정성적 단계에서 정량적 단계로 한 단계 발돋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러한 정량적 과학의 발전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과학아카데미에서 주도했다. 과학아카데미 회원들은 과학사의 잠재력을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예로써 도량형의 개혁을 주장했다.

새로운 도량형 체계는 임의적이지 않고 표준 원기(原器)를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재생이 가능한 것, 또 합리적이면서 보편적이어야 하며 단순해서 사용하기가 편리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10진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프랑스과학아카데미는 최종적으로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자오선(子午線) 길이(90도)의 1,000만분의 1을 새로운 단위 미터로 한다’고 공표했다. 이 결정에 따라 프랑스과학아카데미가 선발한 최고의 천문학자였던 장바티스트조제프 들랑브르(Jean-Baptiste-Joseph Delambre, 1749∼1822)와 피에르프랑수아앙드레 메솅(Pierre-Francois-Andre Mechain, 1744∼1804)은 측량원정을 떠났다. 이들은 정확한 자오선 길이의 측정을 위해 1792년 6월 각각 파리의 북쪽과 남쪽으로 떠난다. 정치적 대변혁기에 이뤄진 그들의 측량원정은 인간사가 길을 뚫어주면 자연이 그 발목을 붙잡고 자연이 문을 열어주면 인간사가 길을 가로막는,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그림 북극에서 적도까지 정확한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기 위해 원정을 떠났던 천문학자들. 좌측이 들랑브르, 우측이 메솅. 사진 출처 : 위키미디어

들랑브르는 싣고 가던 관측기구들이 고성능 무기로 오인돼 민병대로부터 몰수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넉 달간 겨우 64km 밖에 전진하지 못할 정도의 악천후를 만나기도 했다. 남쪽 원정대장 메솅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늑대가 사람을 공격하고 담배와 총기를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밀수업자와 산적이 득실거리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며 관측지점을 찾아야했고, 잠시 머물던 바르셀로나에서는 사고로 늑골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때마침 터진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전쟁은 남쪽 원정대의 발을 동동 구르게 하기도 했다. 다른 원정대원들이 파리로 돌아오고 나서도 정확한 수치를 가져오는 데 7년이나 지체됐다. 그 이유는 메솅이 숨진 뒤 들랑브르가 그의 측량노트를 검토하면서 밝혀졌다. 메솅은 자신의 데이터를 더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 자오선 측량작업을 조작했던 것이다. 정확성을 종교처럼 여기던 메솅은 귀국 후 프랑스 최고 천문가로 대접받으면서도 자신의 오류 때문에 자살을 시도할 만큼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m는 확정됐고, 프랑스는 1799년 6월 미터법을 국가 표준으로 할 것을 법령으로 공포했다. 하지만 미터법은 보급되기까지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프랑스에서는 1840년 강제로 법령을 집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1870년 8월에는 파리에서 국제 미터법 위원회가 발족됐고 1875년 5월 20개국 참가국 중 17개국이 미터 협약에 서명했다.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쳤지만 이제 미터법은 미국 등 극소수의 나라를 제외해 놓고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사용되며 ‘만물의 척도’로 불리고 있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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