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수염엔 이유가 있다!

“아! 아! 아파요!! 따갑단 말야!! 제발 다른 벌을 내려주심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이거보다 재밌는 벌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든!”

아빠는 까끌까끌한 턱으로 태연의 보드라운 볼때기를 마구 비벼대고 있다. 심부름을 거역한 죄로, 태연에게 가해지는 형벌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다는 부비부비형에 처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빠는 오히려 벌을 준다기보다 사랑하는 딸과 볼을 맞대고 있는데서 행복을 느끼는 듯하다. 그러나 태연의 표정은 상당히 고통스럽다.

“아빠는 가해자라서 몰라. 이게 얼마나 아픈지 알아요? 다음날까지 얼굴이 따끔거린다고요. 도대체 남자 어른들 수염은 왜 생겨난 거야? 급할 때 무기로 쓰라고 하나님이 주셨나? 차라리 깎지 않고 내버려두면 내가 잡아당기면서 놀기라도 하지, 이건 고문이 따로 없다고욧!”

수염이 왜 생기냐고? 그건 남성호르몬 때문이란다. 사춘기 이후에 남성호르몬의 작용으로 수염이 돋게 되지. 제 2차 성징의 하나로 남자의 상징이라고나 할까? 남성호르몬은 머리털 성장을 억제하는 대신 수염과 털의 성장을 촉진시킨단다. 반대로 여성호르몬은 수염 등의 성장을 억제하는 대신 머리털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거지. 요즘엔 대부분 깔끔하게 수염을 깎지만 백 년 전까지만 해도 대다수의 남자들이 수염을 길렀어. 이집트에선 상류층 남자들에게만 수염을 기를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기도 했단다.”

“아, 그러니까요. 그걸 귀찮게 왜 자꾸 깎냐고요. 길러서 땋고 다니면 남자들도 편하고, 또 예쁘고, 아이들은 고문을 당하지 않아서 좋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냐고요. 그런데 아빠, 세상 만물 가운데 존재 이유가 없는 것이 없거늘, 어찌하여 수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면서 생겨난 것일까요?”

“넌 심히 짜증날 때마다 순간적으로 똑똑한 말을 하는 습관이 있더구나. 놀라운 내 딸. 암튼, 원래 모든 털은 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단다. 체온을 외부로 빼앗기는 것을 막고, 마찰이나 충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지. 예를 들어 흑인의 곱슬머리는 뜨거운 열대 태양으로부터 두피가 상하는 것을 막아준단다. 동물의 경우 사자의 갈기는 적의 이빨로부터 목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고 말이나 소의 꼬리털은 해충을 막아 몸을 보호하고….”

“아, 그러니까요. 그런 것들은 다 역할이 있는데 남자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턱수염은 왜 생겨나서 절 괴롭히는 것이냐 이 말씀이에요. 제 얘기는.”

“글쎄다. 아직까지 정확히 수염의 역할이 무엇인지 밝혀진 바는 없지만 동물들의 수염 역할을 알아보면 뭔가 실마리가 잡히지 않을까 싶구나. 수염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고양이란다. 고양이 수염은 일종의 안테나 역할을 한단다. 길고 딱딱한 고양이 수염의 끝에 뭔가가 닿으면 고양이는 매우 민첩하게 움직인다고 해. 고양이의 눈은 가까이 있는 물체를 잘 보지 못하기 때문에 윗입술, 눈 위, 뺨, 턱 아랫부분에 나 있는 수염을 가지고 근처에 있는 사물을 인식하는 거지. 특히 먹잇감을 물었을 때, 까딱 잘못하다가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먹잇감에 물릴 수 있기 때문에 이때는 예민한 수염을 적극 사용하곤 하지. 또 쥐 같은 설치류도 수염을 일종의 센서로 이용한단다. 특히 쥐는 수염 한 올 한 올이 마치 곤충의 섬세한 더듬이처럼 사물을 느끼면서 움직이는데, 그 덕분에 어두운 밤에도 재빠르게 잘 활동할 수 있는 거지.”

“헉, 그러면 남자의 수염도 가까이 다가오는 적을 감지하기 위한 안테나였을까요? 어떤 적? 혹시 못생긴 여자를 피하기 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그만하고…! 또 다른 경우를 살펴보자면, 바다표범 같은 경우 물속에서 수염만으로 최대 180m 밖에 있는 사물의 움직임까지 밝혀낼 수 있단다. 초음파로 사물을 추적하는 돌고래의 감지 범위가 110m인데, 그것보다 훨씬 먼 곳을 감지할 수 있다는 거지. 수염이 초음파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는 게 대단하지 않니?”

“아~ 그러니까 이번엔 남자의 수염이 180m 밖에 있는 미녀의 움직임까지 세밀하게 감지하려고 생겨났다는 말씀?”

“우리 태연이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삐딱하실까? 아직까지 남성 수염의 역할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보통 더 남자답고 멋져 보이게 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단다. 새의 볏이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것처럼, 남성의 덥수룩한 수염도 강한 남성의 매력을 여성한테 어필하기 위한 것이란 얘기지.

“음…, 그건 확실히 맞는 얘기인 것 같아요. 전 정말이지 수염이 긴 남자만 보면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니까요~. 그러니까 아빠도 한 번 길러보시는 게 어때요? 차승원보다 백배는 멋질 거 같은데.”

“저, 정말? 그럴까? 내가 워낙 기본이 되는 얼굴이니까 수염을 기르면 더 멋지겠지? 그럼 까끌까끌한 턱으로 태연이 볼때기 비비기 딱 삼천 번 만 더 해보고 길러봐야겠다!”

“꺄악~~!!”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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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를 씽씽~ 증기선 만들기

<실험 보고서>

작성일자 : 11월 xx일
실험 준비물 : 스티로폼, 구리관, 양초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멈췄다. 잠시 고민에 빠진 소년은 쓰던 종이를 구겨 뒤로 던졌다. 제멋대로 날아간 덩어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를 새 종이 위를 달리는 펜의 소리가 덮어 갔다.

선장님께.
화려했던 단풍도 낙엽으로 변해 바닥을 물들이는 계절입니다. 가내 두루 평안하신지요.
일전에 말씀하셨던 건에 대해 제 나름의 답을 찾았기에 이리 편지를 보내 봅니다. 늘 바다 위에 계시는 분인지라 글이 제대로 도달할지 알 수 없지만, 마법 가루를 사용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희의 작은 요정은 성격이 비록 포악하기는 하나 마법 실력은 확실하니까요.

아시겠지만 제가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 몰랐으나 이제와 돌이켜보니 선생이 그리 신통치 않았음을 깨달은 바입니다 - 글 쓰는 실력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대체적으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졸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선생이 워낙 신통치 않아서 벌어진 일이니 애꿎은 저를 탓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일전…, 이라고 해도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만. 선장님께서 제게 문제 하나를 내셨지요. 그 답을 찾으면 다시 연락하라고 하셨고요. 그 말마따나 그때가 사실상 마지막 만남이었지요. (그 이후에도 많이 만났다고 하시렵니까. 제 사전에 의하면 그 상황은 ‘만남’이 아닌 ‘다툼’이나 ‘싸움’, 혹은 ‘전쟁’에 가깝습니다.)

10년이라면 굉장히 긴 세월이지요. 적어도 한 문제의 답을 찾기에는 지나치게 긴 시간입니다. 게다가 알고 보니 이 문제의 답은 굉장히 간단하더군요. 제가 아무리 10살짜리 어린애였다고 해도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아님 선생의 방에 늘어서 있는 책 중 한두 권만 보면 - 선생의 실력은 형편없었지만 그의 장서만은 훌륭했다고 인정합니다 - 금세 찾아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 때 바로 답을 말씀드렸다면 당신이 떠나지 않았으리라 후회….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거세졌다. 마지막 문장에 줄을 박박 그은 소년은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며 숨을 골랐다. 새 종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이 다시 펜을 잡고 원래의 종이 위로 돌아갔다. 새까맣고 질 좋은 잉크 덕분에 완전히 자취를 감춘 마지막 문장 아래 새로운 문장이 이어져 갔다.

그렇지만, 아마 잘 아시겠지만, 그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정신없이 바빴고 책을 볼 시간은커녕 답을 생각할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최대의 원인이 선장님이라는 사실은 아마 부정하지 않으시겠죠. 다행히 10년이라는 세월을 더 허비하기 전에 아주 작은 여유를 찾았습니다. 모처럼 휴전을 선포해주신 덕분에 이리 펜을 들 시간이나마 가질 수 있게 된 점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각설하고,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어째서 이 작은 스티로폼 판자가 앞으로 나갈 수 있을까?’ 이것이 선장님의 질문이었지요. 전 바다의 흐름을 들었고, 바람의 힘이라고도 답했으며,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도 말했습니다. 답은 그 무엇도 아니었습니다. 그건 에너지가 오가고 물질의 상태가 변하며 일어나는 현상 때문이었죠.

스티로폼 판자 위에 꽂은 구리관 밑을 양초로 데우면 안에 있던 물이 끓으며 기화합니다. 물의 상태 변화랍니다. 기체는 액체보다 분자의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 부피가 확 늘어납니다. 구리관 안을 채운 수증기는 결국 구리관 밖으로까지 나오게 되지요. 여기까지가 1단계입니다.

밖으로 나온 수증기는 뒤쪽으로 밀려 나갑니다. 이 힘에 의해 가벼운 스티로폼 판자는 앞으로 나가게 되지요. 상대에게 힘을 가하는 물체는 자신이 가하는 힘만큼 물체로부터 힘을 받는다, 즉 ‘작용-반작용의 법칙’입니다. 배 가장자리에서 마주 서서 선장님 손을 밀어냈을 때, 제가 선장님의 손을 밀었던 힘만큼 뒤로 밀렸던 것과 같은 이유지요. 성격은 나쁘지만 유능한 요정이 아니었으면 그 기분 나쁜 소리가 나는 악어 입으로 빠질 뻔 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만, 그건 넘어가지요. 어쨌든 증기선이 움직이는 이유는 저 법칙입니다.

여기에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하나 더 붙습니다. 양초가 가진 열에너지는 물이 수증기로 변하는 상태변화에너지로 변화한 뒤, 수증기의 힘으로 앞으로 나가는 배의 운동에너지가 됩니다. 에너지는 형태를 바꿀 뿐 그 총량은 계속 일정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외부와의 교류가 없는 닫힌 계 안에서의 이야깁니다만.

정리하자면 물질의 상태 변화, 작용-반작용의 법칙, 에너지 보존의 법칙. 이 세 가지가 얽혀 그 작은 스티로폼 판자를 근사한 증기선으로 변화시켰죠. 이게 10년 전 내주신 문제에 대한 제 답입니다. 아마도 정답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답을 찾을 때까지 크면 다시 연락하라. 선장님의 지령 아닌 지령이었습니다. 그리고 전 답을 드렸구요. 그러니

줄줄 이어져 나가던 펜의 움직임이 다시 멈췄다. 종이 끝을 구기던 소년의 손끝도 함께 멈췄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소년은 입술만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고는 다시 새 종이를 들었다. 이번 펜의 움직임은 아까보다 더 격하고 강했다.

당신은 나에게 장난감 증기선 하나만 던져놓고 도망가 버렸지만, 그런 걸 용서 못할 정도로 쪼잔한 인간은 아니다. 솔직히 당신이 가버린 뒤 엉망진창이 된 이 땅을 다스리고 정리하는 데만 해도 정신이 벅찼기 때문에 개인의 감정까지 일일이 떠올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지. 게다가 난 너무 어렸었거든.

그래, 생각해 봐. 사람을 거뒀으면 적어도 그 놈 정신머리가 클 때까지는 좀 보살펴 줘야 할 것 아냐. 10살짜리 애가 뭘 알겠냐고. 외모고 키고 딱 거기서 성장이 멈춰버린 애라면 더더욱 말이지. 집에서 잘 자던 애를 멋대로 납치한 것까지는 넘어갈게. 나도 여기 와서 나름대로 즐겁게 살았고,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해. 젖 달라고 빽빽거리는 소리가 커뮤니케이션의 전부인 꼬맹이의 미래가 보였다는 둥, 영원히 어린애로 남고 싶은 마음을 읽었다는 둥 그딴 헛소리는 별개로 둘게. 키우는 둥 마는 둥, 제대로 가르친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버려두는 건 또 무슨 짓이야. 그것도 난데없이 적으로 돌변해서!

솔직히 말해 봐. 그냥 버거웠다고. 무슨 중성미자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빅뱅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그런 거창한 문제면 또 모르겠어. 책 좀 뒤지면 바로 나올 간단한 물리 현상을 마치 어딘가의 난제인양 거창하게 던져놓고 ‘다 풀면 또 만날 수 있을 게다’? 장난해? 딱 봐도 애 돌보기 귀찮고 힘들어서 튄 거잖아. 말없이 야반도주하면 더 원망할까 걱정됐어? 차라리 그게 낫겠네. 그럼 그 원망하는 마음만으로 20년은 더 살아. 독하게, 이 악 물고. 당신처럼 애매하게 데려다 놓고 고고한 척 발 빼는 짓보다는 100배, 1000배 낫다고.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서 해적이 돼 분탕질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르겠지만, 심심하면 시비 걸고 여기 애들 잡아 가는 걸로도 모자라 잠깐 친구 삼은 외부 애까지 괴롭히는 이유도 모르겠지만 (아 혹시 납치 협의 뒤집어쓸까봐 붙여보는데, 걘 며칠 있다가 집에 다시 보낼 작정이었어! 나 같이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멈춘 불쌍한 인생 또 만들어서 뭐 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한테 상처 하나 입히지 않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일부러 져주는 이유 또한 모르겠지만…. 10년 동안 밖에서 싸돌아다닌 당신 따위 정말 버리고 살고 싶지만….

어쨌든 나는 답을 찾았어. 답을 찾으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했지? 이번에는 제대로 만나서 내 답을 알려 줄게. 10년 분 쌓인 과한 애정 표현도 함께. 그러니 만나자고. 다툼도, 싸움도, 전쟁도 아닌 제대로 된 만남 좀 갖자고. 아직도 버거워한다면 한 마디만 더 말해 줄게. 에너지는 변해. 그렇다면 당신도 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게 10년간 변하지 않았던 유일한 믿….

티틱. 종이 끝에 펜이 걸렸다. 그게 신호인 듯 갑자기 멈춘 소년이 잠깐 어깨를 떨었다.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어 본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과 함께 조용히 종이를 구겨 던졌다. 마지막으로 한 장 남은 새 종이 위에 짧은 글귀만 휘갈긴 소년은 펜을 집어 던지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도 풀었고 마음도 풀었다. 덧붙여 팬티도 늘려 놨다.
망할 후크 선생은 악당 흉내 그만 내고 집으로 돌아올 것. 어서!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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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1.10 18:20


총알 막는 슈퍼맨 강철 피부가 현실로!

저녁시간, 아빠와 엄마가 약상자를 들고 야단법석이다. 부엌칼에 엄마 손가락이 살짝~, 아주 살짝 베인 것이다.

“허걱, 피가 나잖아! 벌써 세 방울이나!! 응급실에라도 가야 할까? 지혈이 잘 안 되는 거 아냐? 버들잎같이 여리고 여린 내 아내의 손가락을 베다니, 이 나쁜 식칼!!”

태연은 5살 꼬마처럼 엉뚱하게 식칼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는 아빠를 기막힌 듯 바라본다. 아빠의 아내 사랑이 끔찍하기로는 대한민국 1등감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좀 심하다.

“아이고, 피가 다섯 방울 났으면 아주 입원을 시키셨겠네요~. 저번에 내가 무릎 까졌을 땐 쳐다보지도 않으시더니만, 아빠 정말 너무하신 거 아녜요? 그럼 버들잎 같은 엄마 피부를 강철처럼 튼튼하게 만드는 기술을 개발하시든가….”

“맞아! 그러면 되겠구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거미줄을 이용해서 엄마 피부를 강철로 만드는 거야!”

“엥? 뭔 말씀이세요. 전 그냥 농담을 한 거라고요. 아무리 엄마가 다쳐서 속이 상하시더라도 정신줄을 놓으시면 안 돼요. 아빠~.”

“아냐, 얼마 전에 네덜란드에서 거미줄을 이용해 강철같이 튼튼한 실험용 피부를 만들고 거기에 총알을 발사하는 실험을 진짜로 했었단 말야. 실험 결과 정말로 총알이 뚫고 지나가지 못했고. 진정한 방탄피부가 탄생한 거지. 연구진은 우선 염소의 유전자를 조작해서 무당거미처럼 단백질로 꽉 채워진 젖을 생산하게 했어. 그 다음 이 염소젖에서 뽑아낸 단백질을 엮어 직물을 만들고 5주에 걸쳐서 이 직물 둘레에 실제 피부 층이 자라나게 했다는구나. 그렇게 거미줄과 염소젖을 이용한 방탄피부를 만들어 낸 거지.”

“초, 총알도 뚫지 못한다고요? 그럼 실험용 피부 말고 실제 살아있는 사람 피부도 그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는 거예요?

“이론적으로는 그래. 인체에는 피부를 견고하게 하는 케라틴이라는 단백질이 있어. 이 케라틴을 거미줄 섬유의 단백질로 대체하면, 즉 방탄피부와 인간피부를 섞으면 방탄인간이 탄생할 수 있다는 거지.

“와~, 영화에서 보면 총알을 튕겨내는 초인들이 가끔 나오잖아요. 슈퍼맨처럼요. 그런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다니 너무 신기해요. 방탄피부가 되면 군인들은 방탄복을 입을 필요가 없고, 일반인들도 테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고요. 또 엄마처럼 칼에 베일 염려도 없잖아요. 완전 짱인데요!! 그런데 아빠, 거미줄이 그렇게 튼튼한 줄은 몰랐어요. 도깨비 팬티보다 더 질길까요?”

“노래에 나오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들어서 수천 년 입어도 까딱없다는 그 도깨비 팬티 말이냐? 음…, 도깨비와 직접 대화를 나눠보지 못해서 그건 잘 모르겠다만, 암튼 거미줄은 같은 굵기의 강철보다 10배나 강하면서 유연성과 탄력성도 좋아서, 이런 특성을 활용해 첨단 신소재를 개발하려는 시도가 상당히 많단다. 거미줄을 철사 정도의 굵기로만 뽑아낸다면 피아노도 천장에 너끈히 매달 수 있을 거야.”

“거미줄은 하찮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본떠서 첨단과학 기술을 개발한다니 엄청 신기해요.”

바로 이런 걸 생체모방공학(Biomimetics)이라고 한단다. 살아 있는 생물의 행동과 생김새, 생산 물질 등을 모방해서 첨단 제품들을 만들어내는 기술이지. 잠자리 날개를 본뜬 헬리콥터 프로펠러, 상어의 미세돌기를 본 딴 전신수영복, 벽 타기 선수인 개코도마뱀의 발바닥을 본뜬 특수테이프 등등 아주 많지. 자연처럼 완벽한 건 없다는 걸 과학자들도 알고 있는 거야. 그래서 요즘엔 생체모방공학이 ‘미래 세계를 먹여 살릴 10대 기술’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기도 한단다. 거미는 그 중에서도 과학자들이 가장 자주 모방하는 대상 중 하나지.

“와~, 이제 거미를 다시 봐야겠어요. 징그럽다고 피하거나 괜히 심술 나서 거미줄을 막 끊어놓고 그랬는데 이제 진심으로 거미를 존경하려고요. 그런데 존경해 마지않는 그 거미님께 인간은 또 어떤 기술들을 본뜨고 있어요?”

“최근에 개발된 몇 가지만 말해주마. KAIST 이상엽 교수 연구팀은 거미의 실크 단백질을 대사공학으로 개량한 대장균을 이용해서 강철보다 강한 거미 실크 섬유를 만드는데 성공했고, 고려대학교 이상훈 교수 연구팀은 지름이 100마이크로미터(μm·1μm는 100만 분의 1m) 이하로 극히 미세한 극세사(極細絲)를 생산하는데 성공했단다. 이 극세사에 간세포, 섬유세포, 신경세포 등을 심으면 인공 간, 인공 근육, 인공 신경 등의 재료로 쓸 수 있다고 하니 대단하지 않니? 또 독일의 라이프니츠 연구소는 거미줄을 이용해 몸속에서 저절로 녹아 없어지는 수술용 실을 개발하기도 했단다.

“정말 과학자들은 대단해요. 못하는 게 없다니깐~. 근데요 아빠, 거미줄을 이용해 엄마 피부를 강철로 만들면 다치지도 않고 참 좋긴 하겠는데, 촉감까지 강철 같으면 어떡하죠? 아님 도깨비 팬티보다 더 질긴 촉감이 된다거나. 그렇게 돼도 엄마를 사랑할 수 있으세요?”

“물론 사랑할 수 있고말고… 가 아니라, 그런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 내 버들잎 아내를 강철로 만드는 건 안 된다고! 방탄피부 취소, 절대 취소!!”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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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건 모두 안경 탓? 안경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어린이대통령, 뽀로로 군과 국민 MC 유재석씨의 대국민 발표가 있겠습니다.
“에흠흠…, 이런 일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요. 모두 오해시라니깐요! 저희 좀 살려주세요~!”

▲사건의 발단
빰빠라~, 빰빰빰빠!
“과학향기 뉴스 테스크에서 알려드립니다. 2012년부터 전국의 모든 안경이 없어질 전망입니다. 그동안 안경은 눈을 튀어나오게 하고 시력을 더 나쁘게 하는 걸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게다가 안경만 쓰면 미남이 추남이 되고 미녀가 추녀가 되는 기이한 현상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정부에서 안경을 쓴 사람에게 라식과 라섹 수술의 비용을 보조하고 안경을 모두 없애기로…”

뽀로로 : 뭐라구? 안 돼! 저건 안경에 대한 오해일 뿐이라구! 오해 때문에 안경이 없어지다니, 말도 안 돼! 얼른 재석이 형에게 연락해야겠어!

유재석 : 뭐? 안경이 없어지면 우린 끝이야! 당장 안경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해!


▲사건의 전개
“국민 여러분, 안경을 쓰면 못생겨진다고요? 저희를 보세요. 안경도 얼굴 크기나 모양, 색에 따라 자신에게 어울리는 걸 쓰면 오히려 더 잘생겨 보이게 해줘요. 이 밖에도 안경에 대해 오해하시는 게 많은 것 같은데요. 저희가 오늘 다 풀어드리겠습니다!



안경을 써서 시력이 더 나빠졌다? X
막 태어난 갓난아기들은 눈의 길이, 즉 각막과 망막상의 거리가 약 18mm로 짧아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 원시상태다. 이후 몸이 성장하면서 안구도 자라 약 14세 무렵이면 성인 크기가 된다. 이 때 생활습관이나 유전적 요인으로 안구가 정상치보다 길게 자라면 상이 망막 앞쪽에 맺히면서 먼 곳이 잘 보이지 않는 근시가 된다. 즉 시력은 성장기에 안구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자라 나빠진 것이지 안경 때문이 아니다. 다만 자신의 시력과 맞지 않는 안경을 쓰면 안경 때문에 시력이 나빠질 수 있다.


텔레비전을 오래 봐서 눈이 나빠졌다? △
학자들은 근시를 일으키는 데에 유전이 89%, 환경이 11%정도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때문에 부모가 근시일 경우 아이도 근시인 경우가 많다. 2010년 영국 킹스대학교의 크리스 해먼드 박사는 근시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찾아내기도 했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등 한 곳을 오래 바라보거나 어두운 곳에서 책을 보는 습관은 근시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 하지만 오직 그 이유만으로 심각한 근시가 되는 경우는 없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지 마라? X
시력은 안경을 쓰는 것과 관계없이 유전적 요인과 생활습관에 따라 더 나빠지거나 유지된다. 따라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한다고 해서 시력이 더 나빠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근시의 경우 책을 읽는 등 가까운 것을 볼 때는 안경을 벗고 보는 것이 좋다. 가까운 곳을 볼 때는 모양체근이 수축해 수정체를 두껍게 한다. 그 결과 빛이 큰 각도로 꺾인다. 반면 근시를 교정하는 오목렌즈는 빛을 퍼뜨려 빛을 적게 꺾이게 한다. 이 때문에 안경을 쓴 상태에서 가까운 곳을 보면 모양체근이 더 힘을 주어 수축해야 하기 때문에 눈이 더 쉽게 피로해진다.


안경을 쓰면 눈이 튀어나온다? X
안경을 써서 눈이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주로 안구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안경을 쓰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구가 정상치보다 길어지게 되면 자연히 눈이 튀어나온다. 즉 안경을 써서 눈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 튀어나올 만큼 안구가 길어져서 안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어렸을 때는 안경을 쓰지 않는 게 좋다? X
8살 이후부터는 생활에 불편하지 않다면 안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칠판의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 수 있기 때문에 안경을 쓰는 것이 좋다. 하지만 8살 이전에 시력이 나쁜 경우에는 2~3살이라도 꼭 안경을 써야 한다. 사람의 시력은 보통 8세까지 천천히 발달한다. 이 때 아기가 눈이 나쁜 것을 모르고 안경을 쓰지 않으면 시력 발달에 문제가 생겨 약시가 될 수 있다. 약시는 시신경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에는 나중에 안경이나 수술로 시력을 교정해도 사물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tip. 안경, 이제 똑똑하게 맞추자!

근시가 심한 경우를 두고 마이너스(-) 시력이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시력에 마이너스(-)는 없다. 마이너스 렌즈만이 있을 뿐이다. 마이너스 렌즈는 근시를 교정할 때 쓰는 오목렌즈를 말한다. 오목렌즈는 들어오는 빛을 눈 안에서 적게 꺾이게 해서 시력을 교정하기 때문에 마이너스 렌즈라고 부른다. 반면 볼록렌즈는 플러스 렌즈라고 한다. 두 렌즈 모두 절대값이 클수록 시력이 나쁘다는 것을 의미한다.

렌즈를 압축한다는 것도 잘못된 말이다. 눈이 나쁠수록 렌즈의 두께는 두꺼워진다. 굴절률을 높이기 위해서다. 이 때 안경점에서는 소위 ‘압축 렌즈’를 쓰길 권한다. 압축렌즈라는 표현 때문에 보통 렌즈에 힘을 가해 렌즈를 압축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보통 렌즈에 비해 굴절률이 더 높은 재질로 만든 렌즈를 말한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안경에 대한 진실을 이제 아셨죠? 안경이 절대 눈을 더 나쁘게 하거나 못생기게 만들지 않는다고요! 오히려 요즘은 패션 아이템으로도 활약하고 있답니다. 안경테의 색이나 모양에 따라서 다른 분위기를 낼 수도 있고 단점을 감추고 장점을 부각시킬 수도 있지요. 이래도 정녕 안경을 없앨 셈이세요?”


▲사건의 결론
빰빠라~, 빰빰빰빠!
“과학향기 뉴스 테스크에서 알려드립니다. 어제 유재석 씨와 뽀로로 군의 대국민 발표에 이어 소위 안경빨(?)로 살아온 국민들의 서명운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말씀드리는 순간, 속보가 들어왔습니다. 정부가 안경 디자인 뿐 아니라 소재 개발에 대한 연구비를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보이는 것을 넘어 마음을 읽는 안경, 감정표현을 대신해주는 안경 등 재미있는 안경도 개발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잘 보이게 해주는 도구를 넘어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은 안경의 또 다른 변신이 기대됩니다. 지금까지 이화영 기자였습니다”

글 : 이화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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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몬으로 미래 직업까지 알 수 있다고?

모둠숙제를 한답시고 친구 다섯 명을 집으로 집결시킨 태연, 숙제는 열어보지도 않고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없다. 그런데 인형놀이와 종이접기에 푹 빠진 친구들과는 달리, 태연은 장난감 총과 칼로 얌전한 친구들을 방해하는데 여념이 없다. 한참 동안이나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아빠, 급기야 태연과 친구들을 일렬로 앉혀놓고 잣대로 얼굴 사이즈와 손가락 길이를 재기 시작한다. 태연과 친구들, 아빠의 돌발 행동에 어리둥절하다.

“아빠,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흠…, 역시 생각했던 대로야. 친구들에 비해 얼굴이 너부데데하고 약지도 길쭉한 것이, 태연이 너한테 미약한 CAH(선천성부신과형성증) 증상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구나. 정확한 건 병원에 가서 직접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말야.”

“네에??!! 그게 뭔데요! 혹시 불치병에라도 걸린 건가요? 몇 개월이나 살 수 있대요? 흑흑~. 그동안 불효했던 저를 용서해주세요, 아빠….”

“불효녀라는 걸 알고 있다니 다행이긴 한데, 네가 불치병에 걸린 비련의 연속극 주인공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구나. CAH는 부신과 성선의 스테로이드 호르몬이 부족해지는 유전질환이란다. 엄마 뱃속에 있는 여아가 안드로겐(androgen), 즉 남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된 경우에는 남자 같은 성향을 보이고 반대로 남아가 여성호르몬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여자 같은 성향을 보이는 증상을 말하지. 또 태아는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되면 될수록 얼굴이 좌우로 넓고,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길다는 특징을 갖게 된단다. 그런데 태연이 넌 놀 때도 남자애들처럼 총이나 칼을 좋아하고, 얼굴은 넓으며, 약지는 긴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CAH가 약간 있는 게 아닌가 싶다는 얘기야.”

“네에? 그럼 곧 남자가 돼 버리는 건가요? 흑흑, 몇 개월이나 남았어요? 얼마나 여자로 살 수 있을까요?”

“아이고, 오버 좀 하지 마! CAH는 심할 경우 스테로이드 호르몬 부족 때문에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약한 CAH를 보이는 사람은 생활에 전혀 지장이 없어요. 남성적인 점을 잘 살려서 오히려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휴우~~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시지, 완전 겁먹었잖아요!!”

“얼마 전에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학교의 한 연구진이 9~26세의 남녀 125명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는데, CAH가 있는 여성은 엔지니어나 제트기 조종사처럼 일반적으로 남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에 많은 관심을 갖고, 사회복지사나 교사와 같은 직업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단다. 실제로 커서 남성적인 직업을 갖는 경우도 많고 말이야. 다시 말해 호르몬만 가지고도 그 아이가 커서 어떤 직업을 갖게 될 것인지 대충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연구진은 여자 아이들이 CAH가 있는지 없는지를 일찌감치 파악해서, CAH가 있는 아이에게는 어릴 때부터 과학·기술·공학·의학(STEM)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교육을 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고 있단다. 아이의 특성을 빨리 파악해 맞춤형 교육을 해주는 거니까 그만큼 성취도도 높을 거라는 얘기지.”

“아, 그러니까 아빠는 제 적성을 미리 파악해서 능력을 키워주려는 것이었군요. 홍홍홍! 역시 아빠는 나만 사랑한다니깐~~.”

이때 이야기를 듣던 말자가 끼어든다.

“그런데요, 정말로 궁금했던 게 있어요. 검지에 비해 약지가 긴 사람은 남성호르몬에 많이 노출된 경우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약지가 긴 사람이 돈도 잘 번다는데 진짜예요?

“음…,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야.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승부욕이 강하고 공격적이며 매우 적극적인 경우가 많단다. 아무래도 그런 사람들이 승부욕이 적고 수동적인 사람들 보다는 성공하거나 돈을 많이 벌 가능성이 높지 않겠니?

“그럼 얼굴이 널찍한 사람들도 부자가 많겠네요?”

실제로 미국 밀워키캠퍼스의 한 연구진이 미국 최대기업 55개사의 CEO 얼굴을 분석해 본 결과, 널찍한 얼굴의 CEO가 이끄는 회사는 뾰족한 얼굴의 CEO가 경영하는 회사에 비해 재무적으로 훨씬 뛰어난 실적을 거둔 것으로 확인됐단다. 또 복싱 같은 격렬한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넓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어. 남성호르몬이 치열한 승부세계에서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들이지. 또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는다’는 말도 호르몬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이해가 된단다. 용감한 자 즉, 남성호르몬이 많은 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미인에게 구애를 할 수 있으니 미인의 사랑을 얻을 가능성도 훨씬 높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거지. 하지만 반대로 남성호르몬이 많은 사람들은 지나친 승부욕으로 인해 반칙을 하거나 무모한 위험을 무릅쓴다는 연구결과도 많단다.

“그럼 어차피 저는 남성호르몬 과다 분비자랑 결혼할 수밖에 없겠네요. 남성호르몬이 적은 사람은 저 같은 미인에게 감히 도전하지도 못 할 테니까요. 그런데 태연이 아버지는 어떤 쪽이세요? 남성호르몬이 많은 쪽? 적은 쪽? 태연이 어머니가 미인인 걸로 봐선 많은 쪽이신 거 같아요. 얼굴도 태연이처럼 너부데데하시잖아요.”

“허허, 참. 나의 남성미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모양이구나.”

아빠와 말자의 대화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태연이 아빠의 귀에 대고 몇 마디 소근거린다. 순간 아빠의 얼굴이 허옇게 뜨더니만 급히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 태연에게 준다.

“뜻밖의 용돈 완전 감솨! 아빠가 원래는 뾰족 턱인데 넘치는 턱살 때문에 넓적해 보인다는 진실, 그리고 아빠의 찌질한 모습이 불쌍해 보여 모성애를 발휘한 엄마가 그냥 결혼해주기로 결심했다는 진실, 이 두 가지 불편한 진실을 제 친구들에게 영원히 비밀로 해드립죠. 헤헤헤”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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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방울이면 충분해~ 알코올 권총 만들기

윌리엄은 숨을 들이켰다. 저 앞에 선 소년이 똑같은 동작을 취하는 것이 보였다.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긴장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 앞에서 느긋하게 귀나 후비고 있을 인간은 없다. 목숨을 위협하는 상대가 설령 혈육이라 할지라도.

“왜 활을 들지도 않는 거지? 너무 겁먹어서 다리가 풀린 거 아냐?”

낄낄대며 말을 거는 관리 놈의 더운 입김이 몹시 거슬렸다. 내기고 뭐고, 저 놈의 심장부터 꿰뚫어 버리고 싶다.

“네놈이 지껄여대는 바람에 마음의 평정이 풀린 것뿐이다. 입 닥치고 기다리시지.”
“거 참, 말 험하게 하는군. 내 말 한마디면 네놈의 그 잘난 가족도, 마을도 모두 박살나는 걸 모르진 않을 텐데? 좀 더 공손하게 구는 게 어때?”

윌리엄은 한 번 더 숨을 들이켰다. 활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말마따나 마을의 존망이 자신에게 걸려 있었다. 세금으로 마을을 괴롭힌 건 관리지만, 홧김에 활쏘기 내기를 걸어 관리의 성질을 돋운 건 자신이다. 성격대로 굴다가는 가족 뿐 아니라 모두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이다.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옆에 있는 건 관리고 뭐고 그냥 소음 덩어리다. 신경을 끄자. 자신에게 한 번 더 주입시킨 윌리엄은 온 몸의 감각을 활을 잡은 손끝으로 모았다. 과녁은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사과 한 알. 그리고 과녁이 올라가 있는 곳은 사랑해 마지않는 외아들의 머리 위. 수 밀리미터의 어긋남 만으로도 아들의 이마를 꿰뚫을지 모른다. 침착해. 자신을 믿고 쏘는 거다. 우린, 괜찮아.

“쏘겠습니다.”

거울처럼 잔잔해진 마음이 활로 향했다. 길게 당긴 활시위가 팽팽한 공기를 날카롭게 가르며 가늘게 떨었다.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화살은 곧게 날아가 바닥으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중앙이 멋지게 꿰뚫린 사과와 함께.

“오오!”
“역시 윌리엄이 해냈어!!”
“우리의 승리야! 잘했네, 윌리엄!”

뒤에서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의 환호가 울렸다. 굳었던 어깨가, 그리고 심장이 조용히 풀려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윌리엄은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굳이 감추려고 하지 않은 채 조용히 활을 내려놓았다. 아직도 활시위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이유는 멋대로 떨리기 시작한 그의 손 근육 때문이리라.

“자, 제 차례는 끝났습니다. 이제 관리님 측 분께서 쏘실 차례입니다만.”
“아, 알고 있어! 재촉 안 해도 알아서 해!”

입만 딱 벌린 채 - 설마 그 거리에서 명중시킬 줄은 몰랐던 게지 - 멍하니 서 있던 관리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그 와중에도 성질 다 드러내며 큰 소리만 치는 건 천성이 그런 건지, 자리가 그렇게 만든 건지. 겨우 돌아온 여유가 불러온 헛생각을 휘휘 날리며 윌리엄은 다시 소년 쪽을 바라봤다. 역시 여유가 생긴 건지 희미하게 웃고 있던 소년의 입꼬리가, 그러나 차츰 굳어져 갔다. 그의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더 올리는 손길 때문이다. 오자마자 급히 떠나는 여유의 날갯짓 소리, 풀리자마자 다시 굳어가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아프게 때렸다.

“어쩌겠느냐. 겁 없이 내기를 건 내 업보인 것을….”
“뭘 그렇게 구시렁대고 있는 게냐, 시간이 없으니 빨리 진행하자고! 우리 쪽 명사수 대령이시다~.”

어느새 자신만만한 본모습을 찾은 관리의 음성과는 걸맞지 않은 중늙은이 하나가 등장했다. 느릿하게 발을 끄는 폼이 아무리 봐도 ‘명사수’로는 보이지 않는다. 윌리엄은 다시 돌아오려는 여유를 애써 밀어냈다.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활을 가르친 스승도 남 보기에는 그저 그런 노인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을 래야 않을 수가 없었다. ‘명사수’의 어깨에 당연히 걸쳐져 있어야 할 물건이 없는 것이다. 활과 화살 말이다.

“활…은?”
“나는 활을 쏘는 사람이 아니오.”

대신 이걸 쓸 거요. 사수가 주머니를 뒤져 꺼낸 물건은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시커먼 덩어리였다. 눈이 동그래진 윌리엄의 마음을 읽은 듯 너털웃음을 터뜨린 그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물건의 전체 형상을 드러냈다. 언뜻 보기엔 작은 통 두 개를 붙인 형태다. 앞에는 스위치? 옆에서 고개를 길게 빼고 들여다보던 관리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토해냈다.

“그 이상한 물건은 뭐지?”
“내게 활이 없으니 쏠 물건이 필요하지 않겠소?”
“아니, 그건 아는데…. 그 허접한 물건을 갖고 무얼 하려는 겐가?”
“보면 아오.”

다른 쪽 주머니를 뒤적이던 사수는 투명한 액체가 든 작은 병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강하게 올라오는 냄새에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관리도 마찬가지였다.

“으, 술 냄새. 네 놈, 이 신성한 자리에 술을 마시고 오다니 정신이 있는 게냐?!”
“내가 술을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오늘은 마시지 않았소. 닥치고 보기나 하시오.”

검은 물체의 뚜껑을 열고 병을 신중하게 기울여 액체 한 방울을 조심스레 떨어뜨린 사수는 재빨리 물체의 뚜껑을 닫았다. 뚜껑이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하자마자 조금 흔들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휘휘 저어 주변 사람을 물린 사수는 자세를 바로 펴고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두 발짝 뒤로 물러선 윌리엄은 그 눈빛에 순간 숨을 들이켰다. 이 내기, 자신이 질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의 목숨이 함께 져버릴 지도 모른다. 그 순간, 부정(父情)이 공명정대한 마을 대표자로서의 마음을 이겼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공중에 뿌려질 정도의 속도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려던 순간, 사수의 손가락은 인정사정없이 스위치를 눌렀다.

‘펑!’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귀를 막고 주저앉았다. 윌리엄도 예외는 아니었다. 머리에 사과를 얹고 서 있어야 하는 소년만이 온몸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막을 희생했을 뿐이다. 한동안 먹먹한 정적과 싸한 ‘술 냄새’만이 허공을 맴돌았다. 머리를 징징 울리는 소음의 잔해를 떼어내고 겨우 몸을 일으키던 윌리엄의 귓가에 나지막하고 따듯한 목소리가 흘렀다.

“걱정 마시오. 당신의 아들은 멀쩡하오.”
“무슨…?!”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 윌리엄의 눈에 아까와 같은 포즈로 서 있는 소년이 들어왔다. 아까의 소리 때문인지 표정이 조금 멍한 걸 빼면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의 사과도 형태가 조금 변했을 뿐 그대로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내리던 윌리엄의 귓가에 아까와 비슷한, 그러나 좀 더 크고 좀 더 냉정한 목소리가 다시 흘렀다.

“내가 넣은 건 술이 아니라 알코올이외다.”
“알코올? 술 만들 때 쓰는 그것 말인가요?”
알코올은 끓는점이 매우 낮기 때문에 기화가 잘 되오. 게다가 내가 넣은 알코올은 단 한 방울. 이 통을 이렇게 살짝 흔들기만 해도 금세 기체로 변해 통을 꽉 메우게 되지. 액체보다 기체의 부피가 훨씬 크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이외다.
“허어, 그럼 그 알코올 기체가 통 뚜껑을 밀어냈다는 이야깁니까? 그만한 힘이 있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데?”
“물론 이 정도 양으로 통 뚜껑을 그렇게 강력하게 날릴 순 없소이다. 그렇기에 장치 하나를 더 해뒀소. 여기 보이시오?”

자연스레 시작된 설명에 또 자연스레 끌려간 윌리엄은 사수의 손길에 따라 통 안쪽을 들여다봤다. 눈에 익은 물체 두 개가 정답게 마주하고 있었다. 옆에서 귀를 계속 문지르던 관리도 아닌 척 이쪽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역시 아닌 척 자리를 양보해 준 윌리엄에게 고맙다는 말도 없이 척척 끼어든 관리는 걸걸한 목소리로 물체의 이름을 뱉었다.

“못?”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흔한 못이지만, 또 그렇게 흔하지만은 않은 못이라오. 정확히 말하면 전선을 연결해 둔 철 못이오. 전선의 끝은, 보시오. 스위치가 달린 압전기에 연결돼 있지 않소. 이 스위치를 누르면….

목을 길게 빼고 통 안을 들여다보던 관리가 순간 풀쩍 뛰어 올랐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엉덩방아를 찧은 그의 몸 밑에서 낙엽 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함께 공기 중으로 뻗어간 마을 사람의 박장대소가 체면도 뭐도 버리고 부들부들 떨어대는 몸짓과 정확한 박자로 울렸다.

“어이쿠, 아까 쓴 알코올 기체가 조금 남아있었나 보오. 스위치를 누르면 이렇게 나사 두 개 사이에 불꽃이 일어나거든. 알코올 기체가 남아 있으면 당연히 아까처럼 불이 붙겠지. 그러게 좀 조심하시지 그러셨소. 머리카락 괜찮으시오?”
“네 이놈, 일부러 그랬지?”
“남의 설명을 끝까지 안 듣고 위험한 짓을 한 사람이 나쁜 거요. 아니면, 뭐 지금이라도 내기를 무르고….”
“아니, 아니다! 그 같잖은 설명인지 뭔지나 얼른 끝내!”

귓구멍을 후벼대며 관리를 ‘놀리는’ 사수의 모습은 적인지 아군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다. 윌리엄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며 그의 설명에 다시 한 번 귀를 기울였다.

불꽃 때문에 알코올이 폭발하게 되고, 그 압력으로 통 뚜껑이 날아가는 거요. 알코올의 인화점, 즉 불이 붙는 온도는 약 섭씨 12도. 즉 통 안의 온도가 12도 이상이면 알코올에 불이 붙어 폭발하게 된다는 이야기요. 사람 체온이 36.5도 인 걸 감안하면 엄청나게 낮은 온도에서 타오르는 거지. 폭발력의 크기는 뭐, 아까 보셨듯이 꽤 크오. 절대 사람을 향해 날리면 안 되는 물건이지.”

댁에게는 참 미안한 짓을 했소. 뒤에 붙은 말은 윌리엄의 귀에나 들릴 정도로 나지막했다. 아닙니다, 애초에 아들의 목숨을 건 건 저니까요.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을 삼키며 윌리엄은 그저 고개만 저었다. 봤는지 못 봤는지, 반응 없이 돌아선 사수는 손을 저었다.

“여기까지 하겠소. 저쪽은 사과를 꿰뚫었고 나는 떨어뜨리지도 못했으니 저쪽이 이겼소.”
“아니! 그것의 위력이라면 충분히 사과를 날릴 수 있지 않은가! 왜!”
“알코올이 한 방울 밖에 없었소. 그 뿐이오.”
“한 방울은 무슨! 아까 병으로 있지 않…, 으악?!”

침을 튀기며 흥분하던 관리의 옷이 순식간에 얼룩졌다. 싸한 알코올 냄새가 아까보다 훨씬 강하게, 하지만 훨씬 친근하게 퍼져갔다. 아까 ‘인화점’ 이야기에 지레 겁먹은 건지 손을 마구 휘저어 옷을 말리며 펄쩍펄쩍 뛰는 관리를 지나쳐 가던 사수가 고개를 돌리며 씩 웃었다.

“확실히 한 방울만 있었지. 그렇지 않나?”
“…그렇군요.”

윌리엄도 마주 웃었다. 관리의 다른 능력은 인정 못해도, 사람 뽑는 능력 하나는 인정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리고 저 모양, 어쩐지 보기 좋지 않으오?”

난 가리다, 뜻 모를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사내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입을 딱 벌린 채 그 쪽을 바라보는 관리와, 의미도 모른 채 환호하는 마을 사람들과, 바닥에 놓인 활로 차례차례 돌아가던 윌리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아들을 향했다.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들의 머리 위에는 사과 하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처음 놓았던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단지 아까와 다른 점은 한쪽이 둥글게 베어져 나간 채, 맑고 달콤한 즙을 흘리고 있다는 것. 마치 딱 한 입 베어 낸 형태로, 마치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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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넣어도 터지지 않는 부탄가스?

“아빠, 아빠!! 대형 사고에요! 오늘 실과 시간에 오므라이스 만들기를 했는데, 말자네 모둠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빵~ 하고 터졌거든요. 그래서 말자가 너무 놀라가지고 그만 오줌을 쌌지 뭐에요. 우하하하~ 생각해 보세요. 천하에 모범생 말자가 친구들 다 보는데서 오줌을 싸다니 정말 대박이잖아요!”

“뭐?? 그래서 다친 데는 없었니? 친구가 큰일을 당할 뻔 했는데 넌 지금 웃음이 나와? 그러고도 네가 말자 친구라고 할 수 있어?”

생각 없이 깔깔대던 태연은 전에 없이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 얼굴을 보고 웃음이 쏙 들어간다.

“그게 아니라, 그게…, 음…, 하나도 다치진 않았어요. 에잇~ 부탄가스는 왜 터져갖고 날 혼나게 만드는 거야, 부탄가스 미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참에 안전교육을 제대로 해야겠어. 부탄(butane)은 4개의 탄소원자를 갖는 메탄계 탄화수소인데, 강한 압력을 가해 액체 상태로 만들어서 캔에 넣은 게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부탄가스란다. 그런데 그 캔에 열을 가한다고 생각해 봐. 가스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부피도 팽창하지 않겠니? 그러다 캔이 압력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부피가 팽창하면 순간적으로 빵! 하고 터져버리는 거지. 아빠 생각엔 지나치게 넓은 불판을 이용했거나, 불 옆에 부탄가스 캔을 두는 실수를 했을 것 같은데, 어땠니?”

“와! 진정 울 아빠는 족집게셔. 말자가 엄청 넓은 철판구이 전용 프라이팬을 갖고 와서 썼거든요. 그런데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음…, 우리 딸은 가끔 아빠의 유식함을 무시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게 탈이야. 암튼,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너무 큰 불판을 올려놓으면 불판 밑에 모여진 열이 가스 캔에 반사돼. 그렇게 되면 복사열이 생겨서 가스 캔이 마구 뜨거워진단다. 삼발이를 빼놓고 사용하거나 알루미늄호일을 감은 석쇠를 이용해도 복사열이 생기지. 이렇게 부탄가스 캔이 복사열을 받으면 점점 온도가 높아져 가스 부피가 늘어나면서 터져버릴 수 있는 거야. 또 부탄가스 캔을 화기 옆에 두거나 다 쓴 캔을 구멍 내지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도 매우 위험하단다.”

“엥? 다 쓴 캔은 왜 위험해요? 캔은 텅 비어있을 거고, 태울 일도 없잖아요.”

“둘 다 틀렸어. 다 썼다 하더라도 부탄가스 캔에는 약간의 가스가 남아있게 마련이고, 이것을 소각장에서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태우면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는 거지. 또 가끔 가스가 잘 나오지 않는다고 물에 넣고 끓이거나 라이터로 가열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걸 바로 자살행위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부탄가스 캔은 상당히 위험한 물건이란다. 그래서 요즘엔 아무리 가열해도, 심지어는 섭씨 1,000도까지 주변 온도를 높여도 터지지 않는 부탄가스 캔이 출시됐단다.

“와~, 어떻게요?”

캔 뚜껑에 여러 개의 미세한 구멍을 뚫어서 내부 압력이 상승하면 가스를 저절로 배출해 폭발하지 않도록 한 거지. 압력밥솥과 같은 원리인데, 완전 밀폐된 압력밥솥에 밥을 하면 끓는점이 높아져 밥이 빠르게 잘 익지만 반면 계속 그대로 두면 압력을 버티지 못해 터져버리고 말거 아니겠니? 때문에 밥이 다 되면 뜨거운 수증기를 빼서 압력을 내리는 작업을 해야 하거든. 안 터지는 부탄가스 캔도 압력이 지나치게 올라갔다 싶으면 알아서 미리 가스를 배출해 버리는 원리를 이용해 만들어진 거란다.

“쩝, 압력밥솥 얘기 하시니까 갑자기 배가 고픈걸요. 그런데요 아빠, 오늘 진짜 이상한 현상도 하나 발견했어요. 가스레인지를 다 쓰고 가스 캔을 꺼내는데 깜짝 놀랄 만큼 차가워져 있더라고요. 처음에는 멀쩡하던 캔이 불을 잔뜩 뿜어내고 나서 차가워진다니, 이건 또 뭔 요상한 일일까요?”

“좋은 지적이야. 우리 태연이가 간만에 아주 근사한 질문을 했구나. 그건 바로 기화열 때문이야. 앞에서 부탄가스가 기체를 액체 상태로 압축해 놓은 거라고 말했는데 기억나니? 그런데 우리가 가스를 연료로 사용할 때는 그 액체를 다시 기체를 바꿔 밖으로 조금씩 내보내는 거란다. 다시 말해, 액체가 기체로 기화(氣化) 되는 거지. 모든 물질은 기화될 때 주변에 있는 열을 강하게 흡수하는데 이걸 기화열이라고 해. 열을 흡수하니까 주변 온도는 뚝 떨어지게 마련이지. 부탄가스 캔에서 가스가 나올 때도 기화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캔이 차가워지는 거란다.

“아, 뭐가 이렇게 복잡해~. 기체를 압축해 액체로 만들어서 캔에 넣었다가, 다시 기체로 만들어서 불을 붙이는데, 이때 액체가 기체로 변하면서 주변의 열을 몽땅 빼앗기 땜에, 정작 가스 캔은 차가워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구요?”

태연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입을 막는다. 자신이 부탄가스의 원리를 이토록 명확하게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 놀란 것은 아빠도 마찬가지다.

“태연아! 네 머리엔 도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니. 자동 내용정리 머신이라도 들어있는 게야? 너, 혹시 지금까지 바보를 위장한 천재였던 거 아니니?”

“어쩜 좋아. 정말 저 천재 맞나 봐요. 아바마마~ 소녀를 천재로 낳아주셔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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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착륙을 방해하는 바람, 윈드시어

파란 잉크를 마구 풀어놓은 듯 새파란 하늘과 두둥실 떠다니는 하얀 구름, 그 아래로 보이는 제주의 푸른 바다!! 아빠와 함께 제주행 비행기를 탄 태연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창밖으로 펼쳐지는 아름다운 가을하늘을 만끽하고 있다. 단지 아빠의 출장에 묻어온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면 어떠하리. 제주 바다를 즐기며 콧바람을 쐬는 것만으로도 태연에겐 행복 그 자체다.

그런데 멀리 제주공항이 보이기 시작한 바로 그 때, 비행기가 상하 좌우로 마구 흔들리더니 급하강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비행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비행기는 다시 고도를 높이더니 곧바로 ‘돌풍으로 인해 착륙에 실패해 다시 서울로 향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악! 안 돼, 안 돼!! 학교까지 빼먹고 아빠 출장을 따라왔는데, 다시 돌아가면 나는 어떡하냐고요! 기장 아저씨! 스튜어디스 언니! 당장 비행기를 돌리라고요오오오!!”

태연 옆에 앉아있던 할머니도 한몫 거든다.
“그려, 다시 뱅기를 돌리랑께! 경주김씨 백촌공파 4대 독자가 제주섬에서 시방 탄생하는 중인디, 가긴 어딜 간다는겨!!”

“아이고, 태연아! 그리고 할머니! 지금은 도저히 착륙이 불가능한 상황이에요. 회항이 최선이라고요.”

“먼 소리여! 아까까정 바람 한 점 없이 멀쩡하드구만 돌풍은 뭔 돌풍! 기장이 실력이 없어서 못내링께 지금 이 쌩쇼 아닌감?”

“그런 게 아니에요. 지금 부는 돌풍은 ‘윈드시어(wind shear)’라는 건데요. 강한 바람이 다양한 지형지물과 부딪힌 뒤 하나로 섞이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소용돌이 바람이라서 아무리 뛰어난 기장이라도 바람의 방향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어요. 특히 제주도 같은 경우엔 강풍을 동반한 기압골이 한라산을 만나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는 과정에서 윈드시어가 자주 발생해요. 일 년에 평균 408편의 비행기가 윈드시어 때문에 결항을 할 정도라고요. 2011년 8월에는 제주, 부산 등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항공기 129편이 무더기로 결항한 것도 윈드시어 때문이고요.”

“엥? 윈드 거시기가 그러코롬 무서운 겨? 하긴 이름부터 무섭기는 하고만. 잇몸이 어쩌코롬 시려분지 ‘잇몸 시려’에서 따 온 거 아녀? 나이가 드니까 잇몸 시려분게 젤 무섭단 말이재~.”

“깔깔깔!! 윈드시어가 잇몸 시려에서 생긴 말이라니…. 할머니 완전 작명의 달인이셔!! 그런데 아빠, 과학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윈드시어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거예요?”

“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다’가 정답이야. 대신 조종사가 직접 윈드시어를 감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최신 항공기에는 대부분 윈드시어 감지 장치가 장착돼 있지. 만약 이 장치에서 경보가 울리면 비행기는 그 즉시 복행(Go-around)을 해야 한단다. 복행은 착륙하려고 내려오던 비행기가 착륙을 중지하고 다시 날아오르는 비행법이야. 보통 무슨 사고가 났나 싶어 걱정하는 경우가 많지만 윈드시어가 발생했을 때 가장 안전한 대처법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어쨌거나 태어나서 처음 와 본 제주도를 땅 한 번 못 밟아보고 되돌아가야 한다는 게 너무 슬퍼요. 다음엔 윈드시어가 절대 발생하지 않는 날 와야지. 암튼, 그 무시무시한 그 바람만 없으면 맘 놓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거죠?”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냐만 안개, 바람, 뇌우, 눈, 비 등 모든 기상 여건이 비행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단다. 그 중에서도 바람이 가장 무서운데, 지상 500m에서 1,000m 사이에서는 윈드시어가 불어서 무섭고, 높은 고도에서는 갑작스러운 난기류가 생겨 무섭고, 뒤에서 부는 뒷바람은 양력의 크기를 줄이기 때문에 비행기가 잘 날지 못하게 해 무섭지. 또 안개나 눈, 비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리를 짧게 해서 조종사의 안전운행을 방해해. 온도가 지나치게 높아도 공기 밀도가 낮아져 양력이 작아지기 때문에 운항이 어려워진단다.”

“뭔 소리여 이 사람아~. 자꾸 양력 양력 하는디, 세상이 아무리 천지개벽을 혀도 생일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으로 정해야 쓰는겨. 울 4대 독자는 틀림없이 음력을 쓸 것이랑께.”

“하하, 할머니 여기서 양력은 그 양력이 아니라, 비행기를 띄우는 힘을 말하는 거예요. 보통 비행기 날개는 윗면이 볼록하고 아랫면이 평평하게 생겼는데, 그 때문에 날개 위아래에서 공기가 다른 속도로 흐르게 되거든요. 윗면의 공기가 아랫면의 공기보다 빠르게 흐르는 거죠. 그렇게 되면 윗면의 기압이 아랫면보다 작아지고 자연스럽게 비행기 날개가 위로 떠오르는 힘, 즉 양력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가만 가만!! 시방 이 시점에서 어마어마한 생각이 떠올랐구먼. 우리 4대 독자 이름이 번개처럼 내 머리를 치고 간 것이여. 김윈드 어떤감? 윈드시어가 허벌나게 부는 날 태어났응께 말여! 아님 김뱅기로 할까나? 뱅기서 이름을 지었응께. 엉?”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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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으로 움직인다! 자벌레 만들기

청량한 숲 향기를 깊이 들이마신 나무꾼은 들이마신 숨 이상으로 깊은 한숨을 뱉어냈습니다. 근심이 있어서는 아닙니다. 근심이 없는 것 또한 아니지만, 지금의 한숨은 안도에 가까웠습니다.

“갔다. 나오거라.”

한참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나무가 가득 쌓인 등짐에서 나무 같은 뿔 두 개가 뾰족하게 솟았습니다. 오른쪽으로 뾰족, 왼쪽으로 뾰족 느릿느릿 한 바퀴 돌더니 등짐 앞쪽으로 조심스레 나옵니다. 뿔이 공중을 떠다닐 리는 없으니 그 밑에는 필경 짐승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직도 겁에 질린 듯 눈물을 글썽글썽 매단 호수 같은 눈망울도 둘이 솟습니다. 갈색 반점이 사랑스러운 사슴입니다.

“감사하옵니다. 은인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뭘 했다고 그러느냐. 너같이 아담한 짐승 한 마리 숨겨주는 것 정도야 별 일도 아니란다.”

길게 뺀 목을 연신 조아리며 감사의 예를 올리는 사슴 앞에서 나무꾼은 그저 무뚝뚝하게 답할 뿐이었습니다. 사슴이 싫어서는 아닙니다. 성격이 고지식하고 답답해서 그렇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눈치 챈 일이기에 사슴도 과히 싫은 눈치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은인께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 해도 생명을 건져주신 은혜는 은혜. 한낮 미물인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미천하오나, 그래도 능력을 한껏 발휘해 그 은혜를 갚게 해주시면 감사하겠나이다.”
“그런 거창한 일은 아니라 했지 않았느냐.”
“제가 마음이 불편하옵니다. 부디 청을 들어주시옵소서.”

사슴의 고개가 거의 땅에 닿을 듯 굽혀집니다. 연신 손사래를 치는 몸이나 거절을 표하는 입과는 대조적으로, 나무꾼의 귀는 저도 모르게 쫑긋 서 있습니다. 이 작은 것이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해주려나. 어쩐지 저 숲속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습니다. 사슴도 눈치 못 챈 바는 아니지만 자못 시치미를 떼며 얌전하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란 건 어디에서나 같은 법이니까요.

“저 같은 미물의 힘으로도 충분히 준비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선물을 드리려고 하니 그리 염려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작은…, 흠흠. 알았다. 내 얼마든지 기다릴 테니 천천히 하거라.”

‘미물이 준비할 수 있는 작은 선물’이 대체 뭘까요. 나무꾼은 즐거운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표정은 무뚝뚝한 그대로지만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는 것만은 멈출 수 없습니다. 뒤돌아서 부스럭대는 사슴에게는 보이려야 보일 수 없는 광경입니다만.

돌아선 사슴의 주둥이는 은색의 물체가 물려 있었습니다. 크기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일까요. 기대하고 있던 무언가 - 이를테면 돈이라든가, 예쁜 색시라든가 - 가 아닌 걸 확인한 나무꾼의 표정은 대놓고 구겨졌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슴은 우물거리는 발음이나마 똑바르게 이야기했습니다.

“혹시 납작하고 단단한 것이 없겠습니까?”
“아, 여기.”

시큰둥하게 내민 손끝에는 판판한 나무판자가 들려 있었습니다. 사슴은 말없이 주둥이로 물어 올린 은색 물체를 그 위에 툭 떨어뜨렸습니다. 제법 묵직한 무게와 뜬금없는 행동에 놀라서 판자 째로 떨어뜨린 은색 물체는 판자 위에서 홀로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구르다 제자리에서 가만히 떨었습니다. 그 모습이 또 귀엽기는 합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나무꾼의 머리 위에 다시 발음이 명료해진 사슴의 목소리가 툭 떨어졌습니다.

“혹시 ‘관성’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관상은 들어봤다만. 그 점쟁이 말에 따르면 내가 예쁜 색시를 맞아서 평생 행복하게 살….”
“관상 봐주는 사람은 점쟁이가 아니고, 무엇보다 현재 화두는 관상이 아닌 관성이옵니다. 헛소리 마시고 계속 들으시지요. 물체에 아무런 힘이 작용하지 않을 때, 물체가 원래의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을 ‘관성’이라고 합니다. 정지해 있던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고 하고, 운동하던 물체는 그 운동을 계속 하려고 한다는 이야기지요.
“슬슬 말이 거칠어지는구나. 그게 네 본성이냐.”
“저처럼 착하고 고운 미물에게 그 무슨 잔혹한 말씀이십니까. 어쨌든 마차를 타보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저 숲 너머 인간 세상에서는 버스라는 마차가 있습니다만, 말 대신 엔진이라는 물건으로 움직입니다. 그 버스를 타면 말입니다, 갑자기 멈춰 설 때 몸이 앞으로 쏠립니다. 버스가 달릴 때 거기 탄 사람들 몸은 버스와 함께 앞으로 향하고 있는데 버스가 갑자기 멈추면 몸만 관성에 따라 앞으로 계속 가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버스가 갑자기 출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정지해 있으려 하기 때문에 몸이 등받이나 뒤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제가 드린 물건의 안에는 단단한 관과 구슬이 들어있사옵니다. 아까 내어주신 판자 같은 넓은 판에 그 물건 - 일일이 물건 물건 하기 귀찮으니 그냥 자벌레라 하겠사옵니다만 - 을 얹고 기울이면 자벌레가 꿈틀대며 계속 혼자 움직이는 걸 보셨지요. 왜 이리 되는고 하니, 자벌레를 기울이면 구슬이 한쪽으로 이동하면서 가벼워진 쪽이 올라갑니다. 구슬은 계속 이동하려는 관성에 의해 가벼운 쪽으로 다시 이동하고 이 움직임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한 원리이옵니다.”

긴 설명을 끝낸 사슴은 다시 촉촉한 눈망울을 들어 나무꾼을 똑바로 쳐다봤습니다. ‘어때? 신나지? 재미있지? 나 잘했지?’가 가득 담긴 눈망울을 마주한 나무꾼은 어쩐지 거북한 마음에 고개를 돌리며 더듬더듬 말을 꺼냈습니다.

“조, 좋은 말 잔뜩 들었다. 설마 그 말이 선물은 아닐 테고. 이 물건이 선물이냐? 이걸 왜 내게 주느냐?”
“아까 보셨듯이 그 물건의 움직임이 제법 기특하고 또 귀엽습니다. 홀로 지내시느라 쓸쓸하실 때마다 한 번씩 꺼내 보시면 삶이 꽤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준비했사옵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나무꾼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홀로 지내시느라 쓸쓸하실 때’가 있는 걸 알면 또 다른, 굳이 말하면 자기 몸과 마음을 울리는 그런 욕구를 풀어줄 무언가를 준비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좋다 아니다 말도 없이 한숨만 폭폭 쉬어대고 있는 나무꾼 앞에서 사슴의 눈망울이 다시 울망울망 눈물을 매달기 시작했습니다. 걱정하듯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 사슴이 머뭇머뭇 이야기를 꺼냅니다.

“저어, 마음에 들지 아니하신 겁니까?”
“아니, 선물은 고맙다. 고마운데 말이다….”
“말이다…? 제가 뭘 잘못했사옵니까?”

새침하게 고개를 갸웃대는 사슴 앞에서 나무꾼은 그 날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는 게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말이다. 내 본능은 이게 아니라고 외치고 있거든?
“허어? 본능이 뭐라고 외치시고 계시는 겁니까?”

사슴의 맑은 눈이 점점 흐려져 갑니다. 하지만 고지식하고 답답할 뿐 아니라 눈치도 꽝인 나무꾼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입을 점점 과감하게 놀려 갔습니다.

“보통 이럴 땐 그 뭐냐, 어여쁜 선녀님을 내 색시로 맞을 수 있도록 이렇게 저렇게 해주는 거 아니었냐? 목욕탕 급습이라던가, 옷을 슬쩍 훔치게 귀띔한다던가, 왜 거 있잖냐.”
“이보쇼.”
“그래, 이보…, 뭐라고?!”

갑자기 돌변한 사슴의 말투에 나무꾼은 잠시 멍해졌습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온 얼굴에 띄운 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앞발을 까닥거리며 나무꾼을 째려봤습니다.

“내 진짜 기가 막히고 코까지 막혀서 말을 못하겠네. 거 곰방대 좀 주실라우.”
“곰방대?!”
“아 달라면 빨리 주쇼. 뒷다리로 차버리기 전에.”

나무꾼은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슴 앞에 얌전히 곰방대를 내려놓았습니다. 갈라진 앞발굽 사이에 곰방대를 끼운 사슴은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힘차게 빤 다음 가득히 토해냈습니다. 어쩐지 포도청 취조실에서 범인과 5시간쯤 공방을 벌이다 휴식을 취하는 포도부장 같은 기세입니다.

“아이고! 이 양반아, 정신 차리시게.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소리를 하고 앉았나. 댁이 하려는 행위를 세간에서 뭐라 하는지 아시우? ‘납치강간’이라고, 범죄라고 이 양반아!”
“버, 범죄?”
“그래, 사람이 살다보면 쓸쓸할 때도 있고 그런 법이지. 그런데 그걸 왜 자기 힘으로 극복 못 하나. 본인 힘으로 여자 찾아서 장가를 들던가…. 솔직히 불어보쇼. 노력해본 적은 있수? 그 나이 먹을 때까지 산에 처박혀 있지는 않을 테고, 좋다는 여자 한 둘은 있었을 거 아뇨?”
“그, 그래! 있었다 왜! 있긴 했지만 다들 박색에 나이도 꽤 먹어서는….”
“아이쿠야. 생각해 보쇼. 댁 나이 몇 살? 재산 얼마? 거기에 얼굴에 나이까지 밝혀? 이 양반 알고 보니 도둑놈이네~.”
“뭐, 도둑놈?! 말이 너무 심한 것 아냐?”

이제 숫제 삿대질까지 해가며 화를 버럭버럭 내는 나무꾼과 대조적으로 사슴의 표정은 점점 침통해져 갑니다. 곰방대를 물고 다시 한 번 깊숙이 빨아올린 사슴은, 그래도 여전히 맑은 눈망울을 먼 하늘로 돌리며 나지막이 읊조렸습니다.

“사람이란 말이오, 대저 저가 해온 대로만 하려고 하거든. 이게 참 버스를 탄 것도 아닌데 가던 사람은 계속 가려하고, 멈춰있는 사람은 계속 멈춰 있으려 해. 짝을 찾을 때도 게으른 놈은 끝까지 게을러. 저는 안 움직이고 오는 것만 취하려 들지. 그런데 또 가리는 건 많아. 자기 힘으로 열심히 살아온 삶에 긍지가 있으면 말이오, 마음에 드는 처녀에게 그 긍지를 당당히 보여주면 될 것 아뇨. 해본 적 있수? 솔직히, 없지?”

사슴의 목소리가 담배 연기에 실려 함께 퍼집니다. 어쩐지 기세에 눌려, 그리고 또한 사슴의 말이 사실이기에 할 말을 잊은 나무꾼을 다시 쏘아본 사슴은 곰방대를 길게 뻗어 나무꾼의 가슴을 가리켰습니다.

“그런데 뭐? 선녀의 날개옷을 훔쳐? 붙잡아서 평생 같이 살아? 자기 삶 잘 살아가던 여자 인생 하나 깨끗하게 말아먹고 본인만 행복하면 다요? 그것도 같이 알아온 사람도 아니오, 분위기나 배경이 잘 맞는 사람도 아니오, 마음을 맞춰본 것도 아니오. 그냥 예쁘고 날씬하면 장땡이다~하고, 덜렁 붙잡아서 데려가다니 그건 또 무슨 짓이냐고.”

사슴은 곰방대를 바닥에 패대기치며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닥을 구르던 ‘자벌레’를 입으로 물어 올려 나무꾼 앞에 툭 떨어뜨린 사슴은 뒷발을 구르며 콧김을 내뿜었습니다.

“댁 같은 인간에겐 이게 딱 어울리오. 어디 평생 관성에 따라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봤자 좁은 판 위에서 힘 다 떨어져 바르르 떠는 것도 못할 때까지 꿈틀꿈틀 살아보쇼. 난 가오!”

처음의 가련한 모습은 대체 어디로 갔을까요. 힘차게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사슴의 꽁무니를 나무꾼은 그저 멍하니 바라봤습니다. 사슴이 일으킨 흙먼지도 희미하게 사라져갈 무렵, 겨우 떨리는 손으로 자벌레를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가만히 얹어봅니다. 나무꾼의 손바닥 안에서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움직이다가 결국 톡 떨어진 자벌레는 숲 저 안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가 버렸습니다. 마치 사슴을 따라가듯이, 또는 나무꾼을 멀리하듯이. 홀로 남은 나무꾼의 옆에는 그저 못 박힌 채 가만히 서 있는 등짐만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글 : 김은영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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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술, 박쥐에게 배운다!

‘과연 어떤 녀석을 데리고 왔을까?’ 
오늘따라 집으로 향하는 아빠는 발걸음이 급하다. 어젯밤, 무려 14일이나 교제한 남자친구를 당당히 부모님 앞에 소개하고 싶다는 태연의 폭탄선언에 서운함과 뿌듯함 등등 만감이 교차했던 아빠다. 그런데 웬걸. 집에 도착하자마자 태연의 신경질적인 고함소리가 담 밖을 넘는 게 아닌가. 

“너, 지금 내가 공부 못한다고 무시하는 거야?” 
“어허, 아직도 이해를 못하는구나. 박쥐는 조류가 아니라니깐.” 
“날아다니는데 조류지 그럼 어류냐? 난 딴 건 몰라도 무시하는 남자랑은 절대 못살아!” 
“난 너랑 살자고 한 적 없는데?” 
“아니 그럼, 14일이나 사귄데다 손까지 잡았는데 결혼을 안 하겠다는 거야? 이 나쁜 놈! 사기꾼! 바람둥이!!” 

아빠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14일 사귀고 결혼을 하겠다는 태연의 무모함과 박쥐를 조류라고 우기는 무식함에 또 한 번 만감이 교차하는 아빠다. 

“아이고 태연아. 그건 네 남자친구 말이 맞아. 박쥐는 틀림없이 포유류란다. 깃털이 아닌 털로 덮여있고, 알이 아닌 새끼를 낳는다고! 박쥐의 날개는 정확히 말하면 날개가 아니라 ‘비막(飛膜)’이야. 박쥐의 손가락이 점점 길어지면서 손가락 사이의 피부가 늘어나서 날개 역할을 하게 된 거라고.” 

“어머, 정말요?? 원표야 미안해. 내가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봐. 원래의 예쁘고 사랑스러운 태연이로 돌아갈게. 사실 나 싸움 같은 거,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애거든. 호호호” 

아빠는 태연의 가증스러운 애교에 속이 더부룩하다. 하지만 원표 앞에서 태연이의 기를 살려주기 위해서라도 박쥐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줘야겠다고 아빠는 생각한다. 

박쥐는 참 신비한 동물이란다. 하늘을 나는 유일한 포유류라는 점도 그렇지만 더 놀라운 건 최첨단 과학기술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동물이라는 거야. 레이더, 초음파 영상탐지기, 유체흐름감지기, 열감지기 같은 기술들 말이지.” 

“정말요? 아버님, 저는 과학에 아주 많은 흥미를 가진 사나이랍니다. 자세히 좀 말씀해주세요.” 

아빠는 자신을 아버님이라 부르며 적극적인 호감을 표하는 원표가 싫지 않은 듯, 신나게 지식자랑을 시작한다. 

“레이더장치가 뭔지는 알고 있지? 전파를 사방으로 보낸 다음, 그 전파가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분석해서 어디에 있는 어떤 물체가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기계 말이야. 그런데 박쥐도 그와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뛰어난 레이더를 갖고 있단다. 박쥐는 입과 코로 초음파를 내보내. 그 다음 그 소리가 물체에 부딪혀 돌아오는 메아리를 듣고 방향을 설정해서 길을 찾기도 하고 먹이를 잡아먹기도 하는 거지. 초음파는 주파수가 높은 소리로,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음파를 말해. 사실 박쥐의 시력은 아주 나빠. 어두운 곳에만 있다 보니 눈이 굳이 좋을 필요가 없어서 퇴화된 거지. 그래서 시력 대신 초음파 같은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해 생활한단다.” 

“와, 진짜 신기하다. 제 2의 눈이 있는 거네요?” 

“그렇지. 물체를 단순히 인식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주 입체적으로 1mm 차이까지 완벽히 구분해 볼 수 있어. 심지어는 물체의 재질까지 알아낼 수 있다고 해. 최첨단 3차원 초음파 영상탐지기 기능을 하는 셈이지. 보통 병원에 가면 초음파 영상탐지기를 이용해서 뱃속의 아기나 심장 같은 장기의 움직임을 보잖니. 그런 능력이 박쥐에게도 있다고 생각하면 된단다.” 

“대단하네요~.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한꺼번에 수백 수천마리의 박쥐들이 초음파를 낼 땐 어떤 게 자기가 낸 초음파인지 헷갈리지 않을까요?” 

“아주 스마트한 질문이구나! 수천 마리의 박쥐가 초음파를 내는 상황을 한 사람이 수천 개의 라디오 채널을 틀어놓은 것에 비유해 보자. 과연 하나의 내용이라도 정확히 들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인간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그런 일들을 박쥐는 손쉽게 해낸단다. 안타깝게도 그 놀라운 능력의 비밀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어. 하지만 피막에 있는 털이 부드러운 비행을 도와줘서 초음파에 더 정확히 반응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밝혀져 있단다.” 

“엥? 털이 비행을 도와줘요?” 

“신기하지? 박쥐는 급정지, 급출발, 급회전, 거꾸로 날기와 같은 고난이도의 비행도 척척 해낼 수 있단다. 새 보다 비행 솜씨가 좋을 때가 많지. 이런 놀라운 비행의 비결은 피막에 나 있는 미세한 털이라고 해. 이 털은 공기의 흐름을 엄청나게 예민하게 읽어내는 재주가 있어서 공기 흐름에 어긋나지 않게 갑자기 방향을 돌리거나 공중에서 멈추는 것까지 가능하게 해준단다.” 

“처음에 말씀하신 유체흐름감지기와 같은 기능 말이군요. 자, 그럼 이제 박쥐의 열감지기 기능을 말씀해 주실 차례입니다.” 

“원표야, 아나운서 흉내 내지 말고 좀 애답게 말해주면 안되겠니? 암튼 박쥐의 열 감지 능력은 솜씨 좋은 드라큘라가 되는데 꼭 필요하단다. 박쥐의 코에 있는 생체물질(TRPV1)은 열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지. 그런데 동물의 몸에서 정맥이나 동맥이 흐르는 곳은 다른 곳보다 온도가 약간 높아. 박쥐는 그 미묘한 차이를 기가 막히게 구분해서 정맥에 송곳니를 박고 쪽쪽 피를 빨아먹는단다. 물론 모든 박쥐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중앙아메리카 지역에 사는 일부 흡혈박쥐들이 그런다는 거야.” 

아빠의 흡혈박쥐 얘기에 태연의 오버연기가 작렬한다. 무서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원표에서 매달리다시피 한 태연. 태연의 그런 태도를 도저히 봐주기 힘들어진 아빠는 쐐기를 박는 한 마디를 던진다. 

“태연아, 오늘도 부엌에 있는 바퀴벌레 잡아 줄꺼지? 원표야, 너 그거 아니? 태연이가 손바닥으로 바퀴벌레를 찍~ 눌러서 잡는 데는 아주 선수란다. 국가대표 급이야. 태연아 이참에 한 번 보여줄래?” 

“아빠!!!!!!!!!!!!!!!!!!!!”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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