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어느 날.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슈퍼컴퓨팅센터에 슈퍼컴퓨터 4호기 설치가 한창이다. 수십 명의 과학자들이 떼로 몰려들어 행여 흠집이라도 날세라 신주단지 모시듯 다뤄주니 슈퍼컴퓨터 4호기는 오만방자해지는 자신을 주체하기 힘들다.

‘나는 과학자들한테 금보다도 귀한 존재야. 똑같은 연구를 해도 나를 활용하면 수십~수백배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는데 이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세계적으로 ‘슈퍼컴퓨팅 수준=국가 과학기술 수준’라는 공식이 생겨날 정도니 할 말 다 한 거지. 난 정말이지 중요하고 소중해. 우하하하~!’

한참 거만을 떨던 4호기의 눈에 마침 1층 전시관에 얌전히 놓여 있던 슈퍼컴퓨터 1호기 ‘Cray-2S’가 띄었다.

“어이 형씨, 거기서 뭐하쇼?”

“보면 모르냐. 사람들에게 슈퍼컴퓨터가 어떤 역할을 하며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온 몸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근데 너 말이 좀 짧다고 생각하지 않냐? 나는 1호기, 너는 4호기. 난 서열상 너의 형의, 형의 형! 그리고 원조, 시초, 선구자, 첫발인데 말이야. 엉? 요즘 애들은 예의가 없어서 문제라니까.”

<슈퍼컴퓨터 4호기. 사진제공 한국과학기술정보
연구원>

“오래된 게 무슨 자랑이라고…. 난 말이요, 총 연산능력이 322테라플롭스, 다시 말해 1초에 322조번의 연산을 할 수 있단 말입니다. 이 정도면 세계 10위 안에 드는 성능이에요. 반면에 형씨 성능은 어떻소? 내가 듣기론 겨우 2기가플롭스, 즉 1초에 20억 번의 계산밖에 수행할 수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디스크 용량은 고작 60GB. 허! 참! 요즘에는 일반인들이 쓰는 개인용 컴퓨터(PC)도 수백 GB에 달하는데 슈퍼컴퓨터라면 좀 창피한 줄 아세요.”

틀린 얘기는 아니다. 4호기의 말에 잠시 기가 죽은 1호기. 그러나 이 정도에 원조의 자긍심을 버릴 수는 없다.

‘무어의 법칙(Moores Law)’에 따르면 컴퓨터의 성능은 5년마다 10배, 10년마다 100배씩 향상된다고 한다. 지금은 4호기가 저리 오만방자하게 떵떵거리고 있지만 21년 전인 1988년 처음 국내에 슈퍼컴퓨터 1호기가 도입됐을 당시엔 그 역시 세계적인 슈퍼컴퓨터였고 현재 4호기의 위세쯤은 상대도 안될 만큼 귀한 대접을 받았다.

“그래 잘난 너. KISTI에 오는 동안 경호는 좀 받았냐?”

“경호…요?”

“아이고, 경호도 못 받았어? 난 1988년 9월 미국에서 김포공항까지 먼 비행을 마친 뒤 서울 홍릉에 있던 KAIST 시스템공학센터까지 가는 동안 국빈급 경호를 받았었는데. 대통령처럼 높은 사람들이 이동할 때 도로를 통제하며 앞뒤 양쪽으로 순찰차가 경호해주는 장면 너도 알지? 나는 그렇게 수많은 수행원을 이끌고 이동했는데. 그것도 혹시나 기계에 무리가 가면 큰일 난다고 시속 40km 이하로 주행하면서 말이야.”

“난… 그냥 트럭 타고….”

“저런… 쯧쯧. 그리고 지금 네가 있는 이 KISTI 건물이 좀 독특하게 생겼다는 생각 안 드냐?”

“특이하긴 하죠. 네모반듯한 보통의 건물과 달리 팔각형 기둥 모양으로 생겼으니까요.”

“바로 그거야! 잘 봐. 나랑 똑같이 생겼잖아. 난 내 생김새를 본 따서 건물을 만들도록 할 만큼 대단한 존재라고.”

“…….”

<슈퍼컴퓨터 1호기와 꼭 같은 모습으로 만들어진 KISTI. 사진제공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뭐 그렇다고 내가 항상 대접만 받았던 것은 아니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지. 난 열심히 일했어. 그 덕에 우리나라에서도 컴퓨터로 미래를 계산해보는 ‘시뮬레이션’이란 모의실험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지. 그래서 선진국에서만 가능했던 대규모 연구를 국내에서도 할 수 있게 됐어. 하지만 이 때문에 반역자로 몰리기도 했지.”

“반역자요?”

“너 혹시 1980년대 말 건설됐던 ‘평화의 댐’이라는 것 아냐?”

“아뇨…. 제가 아직 돌도 안 지나서….”

“이거 완전 갓난아기네. 아무튼 그때 당시 정부는 ‘북한의 금강산댐이 한꺼번에 방류를 하면 서울이 물바다가 될 수도 있다’며 국민적인 모금운동을 통해 평화의 댐을 건설했어. 그런데 한 과학자가 나를 갖고 금강산댐이 방류한 물이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시뮬레이션을 한 거야. 그랬더니 평화의 댐은 필요 없다는 결과가 나왔지. 과학자는 이를 주장했고 결국 정부의 눈 밖에 난 그 과학자는 당시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당했지. 휴~ 옛날 생각에 괜히 눈에서 땀이 나네….”

“이렇게 대단한 분인 줄도 모르고 건방지게 굴어서 정말 죄송해요, 선배님. 선배님이 대한민국에 슈퍼컴퓨팅 시대를 열어 과학강국의 기틀을 마련하셨듯이, 저도 선배님의 뜻을 받들어 이 한 몸 국가 과학기술 발전에 바칠게요. 당신은 영원한 나의 선배님이세요~!”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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