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연히 다락방이나 창고를 뒤지다 아주 어렸을 때 책상 한켠을 차지했던 오르골을 발견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태엽을 감아 예쁘게 흘러나오는 오르골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돌아가는 오르골 위의 천사와 함께 잠시 아름다웠던 유년시절로 돌아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오르골은 표면에 볼록하게 튀어나온 작은 돌기들을 가지고 있는 금속원통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돌기들이 빗살처럼 생긴 쇠건반을 튕겨 소리를 낸다. 금속원통 표면에 새겨진 돌기들의 상대적 위치와 간격은 흘러나오는 멜로디를 결정하게 되고 원통의 회전속도는 멜로디의 박자를 결정하게 된다. 오르골이 재생하는 음정 하나하나가 반도체 메모리의 한 비트(bit)와는 다소 거리가 멀긴 하지만, 금속원통의 평평한 부분과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각각 논리상태 "0"과 "1"에 해당한다 볼 수 있다.

PC에서 사용되는 D램의 경우 전자를 담는 그릇인 커패시터가 전자로 채워졌느냐 또는 비워져 있느냐에 따라 각각 "1"과 "0"으로 논리상태가 결정된다. 데이터의 기록은 커패시터의 입구를 열고 닫는 스위치 역할을 하는 트랜지스터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전자를 채우기 위해 전류를 공급하면 "1"이라는 정보가 기록된다. 비슷한 방식으로 트랜지스터를 통해 기록된 정보를 커패시터에서 읽어들일 수 있다. 만약 증폭회로에서 전류를 감지하게 되면 커패시터에 전자가 채워져 있었음을 의미하게 되므로 "1"이라는 정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고, 감지하지 못하면 "0"이라는 정보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D램의 경우 커패시터에 저장된 정보 "1"을 읽어들일 때 커패시터를 채우고 있던 전자가 사라지게 되므로, 데이터를 읽어들이는 과정은 소거과정에 해당한다. 따라서, 저장된 정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기과정을 수행 직후 커패시터에 전자를 다시 채워주는 과정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더욱이, D램을 구성하고 있는 커패시터는 전자를 담아두는 완벽한 그릇 역할을 하지 못한다. 컵에 담아놓은 물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증발되어 사라지듯, D램 커패시터에 담겨 있는 전자들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려 메모리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D램의 경우 데이터가 사라지기 전에 65밀리 초 주기로 리프레쉬(refresh)라는 과정을 통해 커패시터에 전자를 공급하는 다시 쓰기 작업을 수행해주어야 한다. 이 리프레쉬 과정으로 인해 D램의 경우 전력소모가 크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더구나 전원을 꺼버리면 D램에 기록된 모든 정보가 없어지는 휘발성 메모리라는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1비트(bit)의 정보는 커패시터, 트랜지스터 그리고 이들을 연결하는 도선으로 구성된 하나의 데이터 저장소에 기록된다. 주어진 면적에 이러한 데이터 저장소를 얼마나 집적시킬 수 있는가가 메모리의 용량을 결정한다. 따라서 더욱 큰 용량의 메모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커패시터, 트랜지스터 및 배선의 크기를 작고 미세하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하지만, D램을 구성하는 커패시터의 크기가 작아질수록 커패시터를 채우고 있는 전하의 누출은 더욱 심각해지게 되어 집적도를 증가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리프래쉬 주기도 더욱 짧아져야 되므로 전력소모가 커지게 된다.

플래시(Flash) 메모리는 휘발성 메모리인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지더라도 기록된 정보가 사라지지 않아 USB 메모리, MP3 플레이어, 디지털 카메라, 휴대전화에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플래시 메모리의 경우 데이터 저장소의 설계가 복잡하고, 신뢰성 있는 읽기/쓰기 반복 회수가 10만 회 정도로 제한적이며, 구동전압이 12V로 높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어 차세대 반도체 메모리로서 이상적이지 못하다.

최근 D램, 플래시 메모리 등 기존 데이터 저장매체의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새로운 반도체 메모리를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저제조비용, 고용량, 비휘발성, 저전력소모, 빠른 작동속도, 많은 읽기/쓰기 반복 횟수, 극한 환경에 대한 내구성은 차세대 메모리가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다. 주목을 받고 있는 비휘발성 메모리로는 M램(Magnetoresistive Random Access Memory), P램(Phase-change Random Access Memory), 그리고 Fe램(Ferroelectric Random Access Memory)이 있다. 이들 메모리는 D램의 커패시터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구조적인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M램은 D램의 커패시터를 자기터널접합(magnetic tunnel junction)이 대체한다. 자기터널접합은 두 개의 강자성체 판이 부도체 판으로 분리된 샌드위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두 강자성체 판 중 하나는 영구자석처럼 극성이 한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으며, 다른 강자성체 판의 극성은 트랜지스터를 통해 흘려주는 전류의 방향에 따라 유발되는 자기장에 의해 그 극성이 바뀌도록 되어 있다. 이때 자기터널효과로 인하여 극성방향에 따라 데이터 저장소의 전기저항이 바뀌는데, 두 강자성체 판이 동일한 극성(→/→)을 가지면 낮은 저항값을, 서로 다른 극성(→/←)을 가지면 높은 저항값을 갖는다. 기록된 정보는 낮은 저항값의 경우 "0", 높은 저항값의 경우 "1"의 논리상태로 저항값을 측정함으로써 읽어들일 수 있다. M램의 경우, 정보는 자석의 극성형태로 데이터 저장소에 저장되기 때문에 전원이 제거되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P램은 D램의 커패시터를 상변환 물질이 대체한다. 상변환 물질은 RW-CD/DVD와 같이 우리에게 친숙한 광디스크에 사용되는 물질과 비슷하여, 높은 온도에서는 저항이 낮은 결정성을 가지며, 낮은 온도에서는 저항이 높은 비정질 상태를 유지한다. 상변환 물질의 저항이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0"과 "1"의 논리상태로 인식함으로써 데이터 저장소에 정보를 저장할 수 있다.

Fe램은 D램의 커패시터에 페로일렉트릭이라 부르는 강유전 물질이 사용된다. 전극을 통하여 강유전체의 양단에 전위를 가하면 편극의 방향을 "up(↑)" 또는 "down(↓)"의 상태로 바꿀 수 있으며, 바뀐 성질은 전위를 제거하더라도 그대로 유지된다. 편극방향이 "up(↑)"과 "down(↓)"인 상태를 각각 "1"과 "0"으로 인식하는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할 수 있다. Fe램은 기존 컴퓨터에 사용되는 D램 급의 고속동작 기능, 플래시 메모리보다 천만 배 이상의 데이터 읽기/쓰기 반복 횟수, 낮은 구동전압, 그리고 전원이 꺼져도 기록된 데이터가 지워지지 않는 플래시 메모리의 장점을 고루 갖추어 MRAM, PRAM과 더불어 고성능, 저전력 소모의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로 관심을 받았었다. Fe램은 M램이나 P램보다 생산 면에서 유리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D램과 마찬가지로 데이터 저장밀도를 높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커패시터의 소형화에 따른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어 비교적 낮은 용량의 메모리를 요구하는 이동통신 단말기, 스마트카드 등에 제한적으로 이용되어 왔다.

이런 가운데 최근 한국표준과학연구원-포항공대-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공동연구진에 의해 동전만 한 크기에 CD 1,500장 이상의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테라비트급 Fe램 구현을 위한 커패시터 소형화 기술은 관심을 끌 만하다. 연구진은 나노미터 크기의 구멍이 벌집 모양으로 배열되어 있는 다공성 산화알루미늄을 마스크로 이용하여 금속-강유전체-금속의 적층구조를 갖는 나노커패시터를 나노점 형태로 대면적의 기판 위에 세계최초로 구현하였다. 아울러 개발된 비연속적 나노점 형태의 커패시터가 박막형태의 커패시터보다 산란장 없이 전기장을 집중시켜 효율적인 데이터 저장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종래의 이온빔식각이나 리소그라피 공정을 이용하면 커패시터의 소형화가 가능하지만, 공정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과 공정과정 중 발생하는 강유전체의 격자손상에 의한 메모리소자의 신뢰성 저하 문제가 있었다. 연구진이 개발한 이번 기술은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기술은 테라비트급 초고용량 Fe램 메모리소자 구현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상용화를 위해서는 각 나노커패시터로의 배선 등 앞으로 극복해야 할 기술적 과제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머지않아 차세대 비휘발성 메모리 반도체는 부팅시간 없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오르골의 은은한 느낌마저 전해주는 MP3 플레이어, 향상된 성능의 디지털카메라 등으로 일상에서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글 : 이우 박사(한국표준과학연구원)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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