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이기는 극한생물?!

‘여름 돼지고기는 잘 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처럼 저온 보관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시절, 여름은 돼지를 잡기에 적합한 시절이 아니었다. 덥고 습한 우리나라 특유의 기온 탓에 여름에는 도살 직후부터 고기는 부패가 시작됐다. 그래서 모처럼 몸보신한다고 돼지고기를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려 오히려 몸이 축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시절, 아낙네들은 여름이면 3일에 한 번 김치를 담가야 했다. 더운 날씨는 김치 속 유산균 뿐 아니라 다른 세균들의 번식도 부추겼기에, 김치는 3일이면 물러 버렸고 김치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우리네 입맛 탓에 여름철에는 번거롭더라도 김치를 조금씩 자주 담가 먹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 조선 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국산 냉장고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1965년(금성사-현 LG에서 만든 ‘눈꽃냉장고’)이었지만, 냉장고 한 대의 가격이 대졸 초임자의 여덟 달 월급과 맞먹을 정도로 비싸서 이를 갖춘 집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하여 우리네 어머니들이 3일에 한 번씩 김치를 담가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벗어난 건 냉장고가 대중적으로 보급된 1980년대부터였다.

냉장고의 보급은 식품 보관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우리는 이제 매일 조금씩 귀찮게 장을 보지 않아도, 한꺼번에 식재료를 사다가 보관하거나 음식을 한꺼번에 많이 만들어 두는 것이 가능해졌다. 저온 보관은 식품의 신선도를 오래 유지시켜주기 때문이다. 식품을 저온으로 보존하는 기술은 크게 냉동과 냉장법으로 나뉜다. 냉동은 빙점(氷點, 0℃로 물이 얼기 시작하거나 얼음이 녹기 시작할 때의 온도) 이하로 물질을 보관하는 것이다. 냉장은 빙점보다는 높으나 실온보다는 훨씬 낮은 상태(일반적으로 0~10℃)로 보관하는 것이다.

식품을 차게 보존하면 일반적으로 보존 기간이 늘어난다. 그 이유는 첫째, 식재료가 가진 효소의 활성을 억제해 변성을 막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껍질을 벗긴 사과가 갈색으로 변하는 갈변 현상은 사과 속에 포함된 페놀 성분이 폴리페놀 옥시다아제라는 효소에 의해 산소와 반응해 갈색을 지닌 퀴논류로 변화하여 일어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껍질을 벗긴 사과라도 즉시 냉장고에 넣으면 갈변 속도가 현저히 느려진다. 효소에 의해 매개되는 반응은 효소의 활성이 저하되면 반응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게 되는데, 대부분의 효소들이 단백질로 이루어져 온도 변화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둘째, 식품을 차게 보존하면 미생물의 증식도 억제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단백질은 온도 변화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데, 미생물 역시 단백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이므로 온도 변화에 따라 활성도가 달라진다. 대부분의 미생물들은 인간의 체온과 비슷한 온도에서 가장 활성을 나타내며 온도가 떨어지면 활성이 저하된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냉장고 속에 넣어둔 음식은 언제나 신선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는 극한 생물(extrempphiles)이라 하여 도저히 생물이 살아갈 것 같지 않는 고온이나 저온, 고압, 고염분, 낮거나 높은 pH를 지닌 곳에서도 거뜬히 살아가는 미생물들이 존재한다. 특히나 미생물은 선호하는 생장 온도에 따라 저온균(psychrophile, 15~20℃ 이하), 중온균(mesophile, 20~45℃), 고온균(thermophile, 45℃ 이상)으로 분류되는데, 시원한 것을 좋아하는 저온균들은 빙점에 가까운 냉장실 속에서도 충분히 생존 가능하며 그 중 일부는 오히려 냉장실 속에서 활발하게 증식하기도 한다.




실온에서 장염 비브리오균의 번식 속도
(출처 : 국가정보포털, http://health.mw.go.kr/AttachFiles/Content/Image/s02_103_i02.jpg)


예를 들어 식중독을 일으키는 장염 비브리오균은 최적 조건에서는 10분에 1번씩 분열할 정도로 번식력이 왕성하다. 상온에 방치한 음식물 중에 장염 비브리오 균이 단 1마리라도 있을 경우, 겨우 4시간 뒷면 이들은 100만 마리 이상으로 불어난다. 따라서 상온에 몇 시간 동안 방치했던 음식물(특히 수산물)이라면 이미 장염 비브리오균은 식중독을 일으키기 충분한 수로 번식한 뒤라 아무리 냉장고 속에 넣어도 식중독을 예방할 수 없다.

역시 식중독을 일으키는 리스테리아균 역시 추위에 강해 냉장고는 무용지물이다. 따라서 이들로 인한 식중독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더운 여름철에는 단시간이라도 냉장 상태가 유지되지 않았던 우유나 유제품, 육류나 생선류는 가급적 먹지 않는 것이 좋다. 심지어 여름철에는 고기의 핏물을 빼기 위해 찬물에 담가 놓는 경우라도 때로는 위험할 수 있으므로, 이 경우에라도 고기를 담근 즉시 그릇째 냉장실에 넣어두는 것이 좋다.

이런 균들은 저온 상태에서 단지 생존이 가능할 뿐이지만, 개중에는 저온 상태에서 오히려 잘 자라는 별종들도 존재한다. 여시니아균의 경우, 빙점에 가까운 저온에서도 얼마든지 번식할 수 있어서 여시니아균으로 오염된 물과 우유, 유제품, 육류 등은 냉장고 속에 넣어두어도 계속해서 번식하여 숫자를 늘린다. 또한 곰팡이의 일종인 푸른곰팡이는 10℃이하 저온에서 활발하게 번식하므로 신선한 상태에서 냉장고 속에 넣어둔 채소나 과일, 식빵이라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이들에게서 푸르게 피어난 곰팡이 자국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저온 세균만 주의하면 냉장고에 보관한 음식을 믿을 수 있는 것일까? 아쉽지만 이 질문에 대한 답도 ‘No’다. 식중독은 살아있는 세균이나 노로바이러스처럼 미생물 그 자체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경우도 있지만, 미생물이 만들어 분비한 독소가 원인이 되어 발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황색포도상구균이 만들어낸 독소다. 황색포도상구균은 저온에서 생존이 어려우며 특히나 조리를 위해 끓이게 되면 바로 사멸한다. 하지만 이들이 만들어낸 장독소는 냉장고 속에 넣어두어도 파괴되지 않으며, 심지어 이들은 100℃에서 60분간 끓여야 겨우 없어질 정도로 내열성이 강하다. 따라서 이미 황색포도상구균이 자라고 있던 식재료는 저온 보관해서 익혀 먹는다고 해도 식중독을 예방하기 어렵다.

냉장고는 식품이 본래 지닌 효소의 활성을 저해하고 미생물의 활동을 억제시켜 식품의 신선도를 유지시켜주는 유용한 존재다. 이 유용한 존재가 계속해서 우리 삶에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냉장고의 기능은 원래 신선했던 식품의 신선도를 ‘조금 더 오래’ 유지시켜줄 뿐, ‘계속’ 유지시킬 수는 없으며, 처음부터 미생물에 상당히 오염된 음식물이라면 이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것만 주의한다면 우리는 더운 여름철에도 기름진 돼지고기와 신선한 생선회를 실컷 먹고 난 뒤 입가심으로 얼음처럼 시원한 수박과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얼마든지 음미할 수 있다. 이 평범한 일상은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도 누리지 못했던 호사인 것이다.

글 :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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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word로 읽는 과학] 좀비가전, 냉장고 문이 저절로 스르륵?! 
2014년 KISTI의 과학향기에서는 [Keyword로 읽는 과학]이라는 코너를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이와 관련된 과학계의 신조어도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이에 [Keyword로 읽는 과학] 코너에서 최신과학기술용어나 신조어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서비스할 예정입니다.
독자 분들의 참여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홈페이지 내 독자참여-주제제안 란, 또는 댓글로 알고 싶은 키워드를 남겨 주시면 선정 후 기사로 제작할 예정입니다. 과학향기 독자 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이런 냉장고 어떤가? 양손에 반찬통이라 문 열기가 어려우면 알아서 척척 문을 열어주는 냉장고. 김치면 김치, 회면 회. 넣은 칸마다 음식에 따라 온도를 맞춰서 바꿔주는 냉장고. 20세기까지 냉장고는 그저 음식을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장소에 불과했다. 하지만 냉장고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냉장고는 점점 더 똑똑해져서 보관된 식자재의 유통 기한을 관리하고, 지금 보관한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알려준다. 앞으로 냉장고는 산지에서 출하되는 제철 채소를 말해주고, 요리 이름을 입력하면 필요한 재료를 인근의 어느 상점에서 가장 싸게 살 수 있는지 검색해줄 것이다. 아니, 계획된 식단에 필요한 재료를 스스로 상점에 주문하고, 결제하는 구매 대행 기능을 갖출 수도 있을 것이다. 식이 요법이 필요한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되는 식품을 꺼낸다면 알람을 울리는 기능도 상상해볼 수 있다.

아마 가까운 미래에 냉장고는 우리들의 영양사이자 식품 구매 대행자가 될 테고, 귀찮은 내부 청소는 내장된 로봇이 알아서 처리하는 능력자가 될 게 틀림없다. 이 모두는 냉장고가 스마트, 그러니까 똑똑해지게 된 덕분인데, 그 비결은 ‘인터넷’이다.

하지만 냉장고가 인터넷에 연결된 이 장밋빛 미래에는 그늘 역시 만만치 않다. 알아서 문 열어주고 온도 맞춰줄 줄 아는 냉장고는 반대로 언제든 제멋대로 문을 여닫고, 작동을 멈춰버리는 악동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소위 ‘어둠의 세력’이 냉장고로 할 수 있는 일을 따져보자.

나와 내 냉장고 정보가 유출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지금 먹는 마요네즈에는 첨가물이 많으니 자사 제품으로 바꾸라며, 내 냉장고 속 정보를 훤히 다 알고 보내는 기막힌 스팸이 폭주할지 모른다. 그러나 스팸 메일은 애교다. 냉장고를 해킹해서, 설정 온도를 제멋대로 바꾸거나 고장을 낼 수도 있고, 작동을 아예 멈추게 할 수도 있다. 특정 기관과 기업의 업무를 마비시키는 디도스 공격에 내 냉장고가 쓰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공격적인 테러리스트들이 냉장고 자체를 원격 폭탄으로 사용하리란 끔찍한 상상도 해볼 수 있다. 이 쯤 되면 인터넷으로 세상에 연결된 냉장고는 미래 사회를 그린 SF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을 지경이다.

‘사물 인터넷(IoT • Internet of Things, 생활 속 사물들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하는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보안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사물 인터넷 기기는 지난해 87억 개에서 2020년에는 500억 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적인 통신 장비 업체 시스코의 존 챔버스 회장은 사물 인터넷 시장의 규모가 19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 정부 역시 현재 2조 3천억 원인 국내 사물 인터넷의 시장이 2년 뒤 4조 8천억 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며 앞으로 이를 경제 성장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마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물건과 기기가 사람을 통하지 않고 서로 연결되고 정보를 공유하는 세상이 곧 도래할 것이다.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2002)’에서 봤던 것처럼 길 가의 광고판마저 나에게 인사를 할 날이 온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사물 인터넷은 태생적으로 보안에 취약하다. 스마트 가전을 내세우지만 TV나 냉장고에는 그 흔한 ID나 비밀번호도 없다. 사물 인터넷 기기들은 대개 운영 체제(OS)를 갖추고 있지만 제품 자체에 보안 기능이 없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해커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

또 무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기기가 많다는 것도 문제다. 유선과 달리 무선은 IP 차단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접근을 차단하고 좀비화된 기기를 추적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사용 빈도가 낮은 기기나 방치된 기기가 범죄의 도구로 쓰일 경우 피해가 발생해도 제 때에 알고 대처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기존의 보안 방식은 PC와 같은 전통적인 인터넷 환경에 맞춰 있어 사물 인터넷 기기에 적용하기 어렵고, 아직까지 사물 인터넷과 관련된 보안 표준과 규제가 없는 상황이다.

TV나 냉장고가 해커들의 공격 대상이 될지 모른다는 건 공상이 아니다. 지난 1월 미국의 보안 업체 프루프포인트는 TV나 냉장고와 같은 가정 내 가전을 이용한 사이버 공격 사례를 공개했다. 이들의 발표에 의하면 2013년 12월 23일부터 2014년 1월 6일까지 약 보름간 악성 이메일 75만 건이 발송되었다고 한다.

국내 보안 업체들은 이미 몇 해 전 가정용 오디오나 프린터가 악성 코드에 감염돼 오작동 하는 모습을 시연해 보였다. TV를 해킹하면 시청자의 사생활을 몰래 촬영해 인터넷으로 생중계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스마트TV의 홈쇼핑 방송을 해킹해 시청자가 주문하면 돈이 해커에게 입금되도록 하는 방식의 새로운 피싱이 나타날 수도 있다.

자동차를 해킹하면 달리는 속도나 방향을 해커가 조작해 사고를 유발할 수 있다. 고작 20 달러짜리 회로 기판 하나를 자동차에 연결하면 가능하다. 의료 기기 해킹은 치명적이다. 모바일 전문 보안 업체 룩아웃은 당뇨병 환자에게 인슐린을 주입하는 인슐린 펌프가 해킹에 취약하다고 경고한 바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테러리스트들은 항공기를 해킹해 경로를 바꾸고 미사일을 엉뚱한 곳에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저 영화 속에서만 있는 일이라고 안심할 수 없다. 온갖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동하게 될 때 엘리베이터는 언제든 생명을 위협할 테니까. 보안을 위해 설치한 디지털 도어록이나 CCTV가 도리어 도둑에게 제 발로 문을 열어주고 증거를 지워버릴 수 있다.

사물 인터넷이 만개한 뒤에는 늦다. 해커들의 천국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 서둘러야 한다.

※좀비 가전 : 해커들이 PC를 해킹해 악성 코드나 바이러스를 심은 뒤 ‘좀비 PC’를 만들어 조종하는 것처럼 해커의 공격에 감염되어 각종 스팸 메일이나 악성코드를 유포하는 스마트 가전 기기.

글 : 이소영 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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