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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5.05.27 [HISTORY]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1)

[HISTORY] 우리나라 최초의 화학박사, 이태규

우리나라에는 아직 과학기술과 관련해서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이웃나라 일본은 과학 분야 노벨상을 19명이나 배출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노벨상 근처도 가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잘 알려진 이휘소 박사는 유력한 노벨상 후보였으나 젊은 나이에 사망했기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연구를 토대로 한 연구자 7명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1호 화학박사인 이태규가 있다. 해방 직전 천재 과학 삼총사(리승기, 정의택, 이태규) 중 한 명이었던 이태규는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노벨상 후보에 올랐고, 그 후에는 노벨상 추천위원이 됐다. 

■ ‘영재(英才)’였던 이태규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이태규는 요즘 소위 말하는 ‘영재’였다. 남달리 똑똑했던 그를 알아본 아버지가 학교를 일찍 보냈으나, 월반(越班)을 거듭한 결과, 4년 만에 경성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또한 졸업 후에는 도지사의 추천을 받아 당시 최고 명문이던 경성보고에 입학했으니, 영재라 불릴 만 했다. 

이태규의 원래 꿈은 소학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경성보고에서 만난 화학 선생, 호리 선생을 만나면서 세계적인 화학자의 꿈을 키울 수 있었다. 1920년에는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히로시마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밤을 새며 다른 학생들보다도 더 열심히 공부한 결과, 교토대학교에 장학금까지 받으며 입학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일본의 최고 화학자인 호리바 신기찌 교수 밑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사진 1. 이태규 이학박사 학위 취득 보도(출처: 1931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태규는 일본에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리나라와 일본 언론에서는 화제를 낳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이태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일본에 남아 7년 동안 조수로 연구에 몰두한 결과, 조교수로 임용되기도 했다.그의 지도교수였던 호리바 신지찌는 “학문에 민족이 따로 있느냐?”고 주장하며, 그의 교수 임용을 설득하기도 했다. 

■ 세계적인 석학과의 만남, 그리고 6.25 전쟁 

이태규는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공부하기 위해 세계적으로 저명한 석학들이 모여 있다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으로 갔다. 당시에 전쟁 때문에 시국이 어지러워, 유학을 가지 못할 뻔 했으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유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태규는 이곳에서 이론 화학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던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1901~1981) 박사를 만나 함께 연구한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1940년). 이것은 화학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최초의 것으로 화학 분야에 많은 발전을 이끌었다. 

해방 후 우리나라는 연구나 공부를 하기에는 상황이 열악했지만, 이태규는 조국으로 돌아와 조선화학회(지금의 대한화학회)를 설립했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화학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화학계 터를 다지기 위해 노력한 것이다. 다시 헨리 아이링 박사가 있는 미국의 유타 대학으로 넘어가 연구를 계속 했고, 그 결과로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했다. 

1955년 헨리 아이링과 공동으로 발표한 이 논문은 그동안 이론적 접근이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현상을 다룬 일반 공식을 제시한 것이다. 비뉴턴 유동이란 뉴턴의 점성 법칙에 따르지 않는 유동이다. ‘리-아이링 이론’으로 그동안은 설명하기 어려웠던 비뉴턴 유동의 상당수를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전쟁이 발발해 이태규도 가족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그는 가족 걱정을 연구에 몰두했고, 훗날 이태규의 성과를 놓고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으려고 밤낮으로 연구하고 공부한 결과라고 전하고 있다. 

■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 

‘리-아이링 이론’으로 그는 학계의 주목을 받았고, 그와 그의 아들, 그리고 헨리 아이링이 공동으로 참여한 수송현상(輸送現象)의 완화원리는 미국 화학회의 산업 및 공업화학분과로부터 상패를 받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미국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을 직간접적으로 지도해 양강, 한상준, 김각중, 장세헌 등 훌륭한 학자를 배출하기도 했다. 1973년 한국과학원의 석좌교수로 귀국했을 때 고희를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후학 양성과 연구를 계속해 20년 동안 70편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했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 인물이 현충원에 안장된 경우는 총 4명이다. 그 중 한 명이 이태규 박사로 과학자로서는 처음으로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유품전시관에는 그의 신조를 적은 액자가 있다.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이 그의 신조였고, 그가 연구에 몰두 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던 것이다. 

글 : 심우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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