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설'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08.09.22 케플러의 추측 - 과일 장수면 누구나 아는 상식 (1)
  2. 2008.08.20 갈릴레이 종교재판의 진실 (1)

동일한 크기의 공을 어떻게 하면 가장 빽빽하게 밀집시킬 수 있을까?
오렌지나 사과를 팔아본 과일장수라면 누구도 경험적으로 대답을 할 것이다. 하지만 수학자라면 정색하며 고민을 할 것이다. 독일의 천재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도 두 손을 들었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1590년대 말, 영국의 항해가인 월터 랠리 경은 자신의 조수였던 토머스 해리엇에게 배에 쌓여 있는 포탄 무더기의 모양만 보고 그 개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라고 요청한다. 수학자였던 해리엇은 수레에 쌓여 있는 포탄의 개수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 간단한 표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배에 포탄을 최대한 많이 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당시 최고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쓴다.

케플러는 당시 관측의 대가인 티코 브라헤의 자료를 이용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고 행성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분석해 내 명성을 얻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그리스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모든 물질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원자로 이뤄져 있다는 원자론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물질을 구성하는 작은 입자들의 배열 상태를 연구하던 중에 부피를 최소화하려면 입자가 어떻게 배열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모든 입자가 공과 같은 구형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쌓는다 해도 사이사이에 빈틈이 생긴다. 문제는 이 빈틈을 최소한으로 줄여서 쌓인 공이 차지하는 부피를 최소화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케플러는 다양한 방법에 대하여 그 효율성을 일일이 계산해 보았다.



우선 인접한 공 4개의 중심을 이었을 때 빈 공간이 정사각형이 되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이 방법을 ‘단순 입방격자’라고 한다. 이 경우 주어진 공간의 52%만을 공으로 채울 수 있다. 공이 채울 공간과 공 사이의 공간이 거의 반반인 셈이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던 케플러는 ‘면 중심 입방격자’일 때가 주어진 공간에 74%를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알게 됐다. 즉 인접하는 공 4개의 중심을 이었을 때 빈 공간이 정육각형이 되도록 채워 넣는 것이다. 이것이 케플러의 가설이다.

사실 이것은 과일장사가 과일을 쌓아올리는 방법이기도 했다. 과일 장사들은 경험적으로 먼저 과일을 가로 세로로 나란히 줄 맞춰 바닥을 채운 뒤, 과일 사이의 패인 홈에 과일을 올렸다. 이 방법으로 계속 과일을 쌓아올리면 과일 1개의 위, 아래에는 각각 4개의 과일이 위치한다.

이와는 조금 다른 방법도 있다. 먼저 과일을 한 줄 늘어놓은 뒤 그 옆에 과일을 배열할 때는 수직방향으로 나란히 배열하지 않고 과일 2개 사이의 오목한 사이에 놓는다. 이렇게 서로 어긋나게 과일을 배열해 바닥을 채운 뒤, 그 윗줄에는 과일 3개가 만드는 홈에 과일을 올려놓는 식으로 쌓는다. 이렇게 하면 과일 1개 주변에는 12개의 과일이 위치한다. 케플러는 사실상 이 두 가지 방법은 같은 배열방식이라고 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뛰어난 수학자인 케플러조차 자신의 가설을 수학적으로 입증하지 못했다. 경험적으로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수학적으로 증명을 해내지 못한 것이다. 후대 수학자들은 이 케플러의 가설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뉴턴, 라그랑주, 수학의 황제로 불리는 가우스, 악셀 튜에, 라슬로 페에스토트, 다비트 힐베르트, 우이 시앙… 그리고 추측을 최종적으로 증명해 낸 토머스 헤일스에 이르기까지 이 시도는 계속됐다. 이 과정에서 케플러의 가설은 라그랑주, 가우스 등 수학 천재들에 의해 증명의 발판이 마련됐으나, 완전히 증명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98년 미시건대 수학자인 토머스 헤일스와 그 제자인 숀 팩러플린은 마침내 ‘증명’이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시대를 잘 타고난 덕택에 대용량 컴퓨터를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케플러의 가설을 수학적으로 증명하는데 꼬박 10년이나 걸렸다. 증명의 증거로 내놓은 것은 복잡한 수식으로 채워진 2백50쪽에 달하는 논문을 담은 컴퓨터 파일이었다. 케플러의 가설을 수학으로 증명하기 위해 1백50개의 변수를 지닌 방정식을 풀어야 했다. 이 변수들은 채우는 방식이 바뀔 때마다 변하기 때문에 아주 복잡했다. 만일 연필과 종이 등의 재래식 방법을 이용하려고 한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헤일스도 처음에는 일반 컴퓨터를 동원했는데, 방정식을 풀면서 혼동상태가 돼버리고 말았다. 결국 대학원생인 새뮤얼 퍼거슨이 대용량 컴퓨터를 동원하고 나서야 문제 해결의 지름길을 찾아냈다.

수학의 세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동네에서 사과나 감귤을 파는 상인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을 법한 경험적인 사실을 수많은 천재들이 무려 387년이라는 세월을 투자하고, 대용량 컴퓨터까지 동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수학의 순수한 매력일지도 모른다.

글 : 유상연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글이 유익하셨다면 KISTI의 과학향기를 구독해 보세요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 과학의 아버지 등으로 칭송되며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이는 그 인기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많지만 그 이야기 중 많은 것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되어 있다.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갈릴레이만큼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신화가 되어 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진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갈릴레이의 이야기에 이렇듯 과장이나 거짓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과연 이야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갈릴레이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해인 1564년에 이탈리아 피사의 몰락한 귀족인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재다능했던 갈릴레이는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류트와 오르간 연주에 재능을 보였으며, 문학에 대한 논문을 쓸 정도로 학식이 풍부했다. 또한 미술에는 당시 뛰어난 화가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만큼 조예가 깊었다. 이렇게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갈릴레이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수학 개인교사의 길이었다. 갈릴레이는 피사 대학에 다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즐겼기 때문에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향은 결국 그를 종교재판에 이르게 만든다.


흔히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즉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이 교회와 과학과의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만일 그랬다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주장한 갈릴레이보다는 코페르니쿠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금서가 되기는 했지만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지도부 내에서도 갈릴레이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를 진실에 대한 교회의 탄압이라고 보는 견해는 지나치게 사건을 단순화시켜 그 본질을 왜곡시킨 것이다.


역사적 추론에 의하면 갈릴레이는 예수회의 음모에 빠지게 되었거나 단순히 그의 책 표지에 있는 돌고래 문양이 오해를 받아 종교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수도 있다. 돌고래를 뜻하는 돌핀(dolphin)은 프랑스의 황태자를 가리키는 도핀(dauphin)을 뜻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교를 지지하는 예수회 입장에서는 그 그림을 반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돌고래 문양은 단지 갈릴레이의 책을 출판한 회사의 심벌마크였을 뿐인데 신교도와 구교도가 대립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그런 오해가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갈릴레이의 책이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게 된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며, 갈릴레이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회는 70살의 병든 늙은이였던 갈릴레이를 고문하지 않았으며, 단지 암시적인 고문의 위협만 가했을 뿐이다. 고문과 화형의 위협에 의해 병들고 늙은 갈릴레이가 굴복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이야기꾼들이 이 사건을 교회와 과학의 갈등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다. 또한 갈릴레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했기 때문에 저 유명한 대사를 내뱉지 않았으며, 이런 위험한 말을 함부로 할 만큼 갈릴레이는 무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갈릴레이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었다. 망원경을 원로원에 제출하여 멀리서 들어오는 배를 먼저 발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많은 상금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망원경으로 관측하여 출간한 ‘별의 메시지’라는 뜻의 <Siderius Nuncius>라는 책을 자신의 제자인 메디치가의 코시모 2세에게 바쳤다. 이 책에서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 4개에 ‘메디치의 별’(물론 오늘날에는 갈릴레이의 이름이 붙여졌지만)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화려한 문장으로 헌정의 말을 적었다. 이 헌정사를 읽어 보면 갈릴레이는 아부의 지존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갈릴레이에 대한 과장된 전설은 이뿐 아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실험인 피사의 사탑 실험도 그가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갈릴레이는 물체의 무게에 상관없이 모든 물체는 동시에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590년 피사의 사탑에서 공개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실험에 대한 기록이 갈릴레이의 저서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공개 실험이 있은 지 거의 50년이나 지난 1638년 출간된 갈릴레이의 저서 <신과학의 대화> 속에 100m 높이에서 포탄과 총알을 같이 떨어뜨리면 1스판(약 20cm) 정도로 거의 동시에 떨어진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실제 이러한 실험을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사이먼 스테빈(Simon Stevin)이다. 1586년 스테빈은 10m 높이의 2층 창에서 무게가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린 실험을 했다.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를 너무나 존경했던 제자 비비아니(Vincenzo Viviani)가 스테빈의 실험을 스승의 것으로 포장해 갈릴레이의 전기 속에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피사의 사탑 실험은 스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이 빚어낸 과장된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진자의 등시성에 얽힌 이야기도 비비아니의 각색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비비아니에 의하면 당시 19세였던 갈릴레이는 피사대학에서 예배를 보는 것을 지루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때마침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이 흔들린 샹들리에를 보고 자신의 맥박을 이용해 진자의 등시성을 알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에 샹들리에가 설치된 때는 갈릴레이가 19세였던 해로부터 4년 후인 1587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갈릴레이의 신화가 무너진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신화화된 영웅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에 한층 더 정을 느끼게 된다.


글 :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글이 유익하셨다면 KISTI의 과학향기를 구독해 보세요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1 
BLOG main image
생활에 밎줄 긋는 과학이야기♡ -KISTI의 과학향기-
by 과학향기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178)
과학향기 기사 (892)
과학향기 이벤트 (1)
과학향기 독자참여 (1)
이런주제 어때요? (1)

달력

«   2017/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istory!get rss Tistory Tistory 가입하기!
Clicky Web Analytic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