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역사] 입 밖으로 나온 소리, 녹음 기술로 주워 담는다

‘한 번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글은 종이에 기록하고 모습은 그림으로 담아내지만 소리는 발생하자마자 사라지기 때문에 잡아두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류 최초로 소리를 붙들어 기록한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인쇄업자 에두아르 레옹 드 마르탱빌(Edouard-Leon de Martinville)이다.

책을 만지는 직업 덕분에 최신 과학기술에 대한 정보를 빨리 얻었던 마르탱빌은 ‘포노토그라프(phonautographe)’라는 발명품으로 1857년 3월 25일 프랑스 특허를 획득했다. 소리(phon)를 스스로(auto) 기록한다(graphe)는 뜻이다. 축음기, 즉 ‘소리를 저장하는 기계’가 등장한 것이다.

포노토그라프의 원리는 간단했다. 소리를 모으는 통의 끝부분에 뻣뻣한 털로 만든 솔이 달려 있다. 솔의 끝은 램프로 그을려 검댕을 묻힌 검은색의 실린더 위에 놓았다. 통에다 대고 목소리를 내면서 손으로 실린더를 돌리면 음파에 따라 솔이 떨리고 원통에 흔적이 남는 방식이다. 소리가 어떠한 떨림을 만들어내는지를 물질적으로 기록해 살펴보게 한 최초의 성과다.

그러나 포노토그라프는 소리를 잡아두기만 할 뿐 다시 들어보지는 못한다는 심각한 단점이 있었다. 솔 자국이 남은 검댕을 건드리면 원본이 훼손되기 때문에 그저 음파를 기록하는 용도로만 써야 했다. 녹음된 소리를 재생한다는 아이디어는 남프랑스 출신의 아마추어 과학자였던 샤를르 크로(Charles Cros)가 떠올렸다.

크로는 검댕 대신에 금속판을 씌운 원통을 바늘로 긁어 기록하면 단단하게 새겨지기 때문에 재생을 하는 것도 가능할 거라 생각했다. 당시에 사진을 인화할 때 쓰던 에칭(etching) 방식을 활용한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금속 원통의 표면에 산성 물질에도 부식되지 않도록 내산 코팅을 한다. 원통을 손으로 돌려 천천히 회전시키는 동안 외부의 음파에 의해 소리통 끝부분의 바늘이 떨리면 자국을 남기고 그 부위는 코팅이 벗겨진다. 원통을 꺼내 산성 용액에 담그면 바늘이 지나간 자리는 부식이 되면서 사진을 찍은 것처럼 굳어진다. 그 원통을 다시 소리통과 연결하면 굳어진 홈을 따라 바늘이 움직이면서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다.

소리(phon)를 기록한다(graphe)는 의미로 ‘포노그라프(phonographe)’라 이름 붙여진 크로의 발명품은 1877년 10월 10일 작동 원리와 제작 방법을 설명한 논문이 발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시인으로도 활동했던 크로는 딱딱한 이름보다 ‘팔레오폰(paleophone)’이라는 특이한 명칭을 선호했다. 과거(paleo)의 소리(phone)라는 뜻이다.

그러나 최초의 축음기를 발명한 것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따로 있다. 발명왕 ‘에디슨’이다.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은 1877년 11월 21일, 세계 최초의 축음기 ‘포노그래프(phonographe)’를 발명했다고 공포했고, 29일에는 기계도 공개했다. 미국 특허를 획득한 것은 이듬해인 1878년 2월 18일이었다. 크로보다 늦었음에도 에디슨이 최초의 축음기 발명자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크로는 소리를 저장했다가 재생하는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렸지만 작동 원리만 제시했을 뿐,실제 기계를 완성하거나 설계도를 그린 적이 없었다. 모두를 위한 아이디어라며 특허권도 주장하지 않고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작동 원리를 공개했다. 그가 떠올린 에칭 방식의 원통은 초창기 녹음 기술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크로는 1888년 8월 9일 4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부와 명예를 누리지 못했다.

반면에 에디슨은 1877년 12월 완제품을 들고 인기 과학 신문사 ‘사이언티픽 아메리칸(Scientific American)’으로 찾아갔다. 기자들 앞에서 물건을 올려놓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원통형 실린더를 돌렸다. 그러자 기계에서 에디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녕하십니까? 잘들 지내시나요? 포노그래프가 마음에 드십니까?(Good morning. How do you do? How do you like the phonograph?)”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의 입 밖으로 나온 소리가 기록되고 다시 재생될 수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람의 목소리를 들려준다고 해서 ‘토킹 머신(talking machine)’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처럼 에디슨은 자신의 업적을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수많은 발명품에 일일이 특허를 신청할 만큼 주도면밀했다. 덕분에 역사를 바꿔놓은 인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에디슨이 만든 축음기는 어떤 원리로 작동했을까. 혹시 크로가 남겨놓은 아이디어를 가로챈 것은 아닐까. 당시 에디슨의 설명을 들어보면 축음기 아이디어는 독자적으로 완성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보가 주고받는 메시지를 기록하기 위해 에디슨은 회전하는 원반 기계 위에 둥근 모양의 종이를 깔고 철심을 연결했다. 철심은 전기 신호에 따라 반응하는 전자석에 연결했다. 전선을 따라 전보가 들어오면 전자석이 움직이면서 종이에 자국을 남기는 식으로 메시지를 기록했다. 그 때 새로운 발상이 에디슨의 뇌리를 스쳤다. 이렇게 홈이 파인 종이를 다른 원반 기계에 올려놓고 회전시키면 메시지가 다시 재생되지 않을까? 이 장치를 전화기에 연결하면 사람의 목소리도 받아 적고 또 내보낼 수 있지 않을까?

전화기는 사람의 목소리에 따라서 떨리는 진동판이 전기 신호를 만들면 반대편 전화기에서 그 신호를 받아 다시 진동판을 움직여 재생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에디슨은 진동판을 회전 원반 장치에 연결시켰다. 누군가 큰 소리를 내면 진동판이 떨리고 그 에너지를 이용해 원반을 회전시킬 수 있었다. 거꾸로 원반의 회전에 따라 진동판이 떨리게 만드는 것도 가능했다. 소리를 기록하고 다시 재생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에디슨은 원반 위에 종이를 까는 대신에 원통에 얇은 은박지를 둘러 사용했다. 진동판의 미묘한 떨림까지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원통이 회전하는 동안 소리통에 연결된 바늘이 은박지에 자국을 남기고 그 부분에 다시 바늘을 대면 녹음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기계 장치를 완성한 후 에디슨은 직접 소리를 내서 녹음 기능을 실험했다. 당시 동요로 널리 불리던 ‘메리는 어린 양이 있었죠(Mary had a little lamb)’였다. “메리는 어린 양이 있었죠. 양털은 눈처럼 하얬죠. 메리가 어디를 가든. 어린 양은 꼭 따라다녔죠.” 유튜브에서 ‘edison’과 ‘phonograph’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127년 전의 목소리를 지금도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한 이후 흥미가 시들해졌다. 신기하고 재밌지만 별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86년 치체스터 벨(Chichester Bell)과 찰스 테인터(Charles Tainter)가 은박지 대신 밀랍을 씌운 원통을 사용한 ‘그라포폰(graphohone)’으로 새로운 특허를 받고, 1887년에는 에밀 베를리너(Emil Berliner)가 ‘그라모폰(gramophone)’을 출시하자 시장이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벨(Alexander G. Bell)도 1879년 ‘볼타 실험실(Volta Laboratory)’을 설립하고 연구를 거듭해 1886년 밀랍 방식의 축음기로 특허를 획득했다. 회의 기록용으로 축음기의 인기가 높아지자 에디슨은 다시금 축음기 개발에 뛰어들어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에 신제품을 출시하기도 했다.

이후 녹음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서 ‘LP’라 불리는 레코드판, 자기 방식으로 기록하는 카세트 테이프, 레이저로 인식하는 컴팩트 디스크(CD), 컴퓨터 파일로 저장하는 엠피스리(mp3) 포맷을 등장시켰다. 자연의 소리를 붙잡아두기 위해 수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노력했지만 에디슨은 새로운 발상과 기술을 이용해 꿈을 현실로 바꿔놓았다.

이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2008년 미국 과학자들이 마르탱빌의 원통에 새겨진 문양을 컴퓨터로 스캔해 실제 소리로 변환시키는 데 성공했다. 스피커에서는 1860년 녹음 당시 포노토그라프 앞에 서서 떨리는 마음으로 동요를 부르던 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환한 달빛 아래 내 친구 피에로야(Au claire de la lune, mon ami Pierrot)…, 환한 달빛 아래 내 친구 피에로야….” 기계 장치에 의해 최초로 녹음된 사람의 목소리는 이제 에디슨이 아닌 프랑스 꼬마로 주인이 바뀌어야 한다.

글 : 임동욱 과학칼럼니스트


*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는 현재 안토니오 무치로 인정되어 있다.
과학향기 2012년 2월 3일 자 칼럼 ‘최초의 전화 발명가는 벨이 아니다?’ 참고.
http://scent.ndsl.kr/sctColDetail.do?seq=4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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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은 누구인지 기억하니? 그럼 네 번째 사랑은?”
“백화점 1층에서는 뭘 팔지? 그럼 6층에서는?”

첫사랑은 기억해도 그 다음 사랑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백화점 1층에서 명품을 판다는 것은 쉽게 떠오르지만 2층 이상에서 무엇이 어떻게 진열돼 있는지 아는 사람은 적다. 과학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초로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을 아는 사람은 많지만, 그에 버금가는 천재 과학자, ‘테슬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인기를 얻고 있는 개그프로그램의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를 들으면 비운의 과학자, 테슬라가 떠오른다. 에디슨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그의 인생을 돌아보며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 있는 ‘1등지상주의’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좋겠다.



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이보다 앞서 2005년 말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테슬라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과학자 테슬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계가 이렇게 새롭게 주목을 하는 것일까?

테슬라는 현대 전기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고주파를 발생시키는 테슬라코일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테슬라코일을 이용하면 물체에 자기장을 걸어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말 개봉한 ‘프레스티지’(Prestige) 영화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이동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테슬라코일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테슬라는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가’ 등의 호칭도 갖고 있다.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의 발명노트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현대 과학기술을 예견하고 아이디어를 준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애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고압 교류로 동물을 죽이는 공개 실험을 하고,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집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했다. 1915년 뉴욕타임즈에 테슬라와 에디슨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결국 둘 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테슬라가 에디슨과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이를 통해 테슬라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나게 되길 기대한다.

글 : 남연정 과학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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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학수사대입니다. 저 과학탐정은 과학사에 여러 억울한 일들을 바로잡겠다는 각오로 오늘도 열심히 수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과학계의 여러 분이 저를 찾아오시지요. 어찌나 억울한 일을 당하신 분들이 많은지 잠시도 쉴 틈이 없답니다.

“똑똑”

“아, 또 오셨군요. 이제 상담을 시작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내 이름은 찰스 휘트스톤(Charles Wheatstone)이라오.”

“아~ 휘트스톤 경이라면 영국의 물리학자가 아니십니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흠흠. 과학을 좀 아는 친구로군. 그렇다면 얘기하기가 쉽겠어.”

“워낙 유명하신 분이니까요. 전기학이론 ‘휘트스톤 브리지’의 발명가이시고, 3차원 입체 영상을 관측하는 데 쓰이는 장치를 개발하셨죠. 그야말로 과학자로 발명가로 종횡무진 공이 많으시니까요.”

“으흠, 내가 온 것도 그 때문인데. 내가 좀 욕심쟁이로 비칠까 걱정이 되긴 하네만, 그래도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지 싶어서. 자네 혹시 플레이페어 암호(playfair cipher)라고 아는가?”

“영화 ‘내셔널 트레저:비밀의 책’에 나오는 바로 그 암호 기법이 아닙니까? 그건 왜요?”

“실은 그걸 내가 발명했다네. 1854년의 일이지. 날짜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네. 1854년 3월26일이었지.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름은 플레이페어 경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어. 이름을 바로 잡을 방법이 없겠나?”

“그런데 어쩌다 플레이페어 경의 이름이 붙게 된 겁니까?”

“내 암호법은 너무 복잡하다는 이유로 사용되지 않았네. 2차 보어전쟁이나 세계 1차 대전에서 이 암호가 널리 쓰이게 된 것은 플레이페어 경의 공일세. 이상한 것은 플레이페어가 이 암호법을 공표했을 때, 원래 내가 발명했다고 밝혔는데도 이름은 플레이페어 암호가 되었어.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네.”

“참 이상하고, 애석한 일이네요. 하지만 플레이페어 암호를 휘트스톤 경이 만들었다는 진실만큼은 세상이 알고 있으니, 이름이 그렇게 된 것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셔야 하지 않을까요? 사실 이 과학사의 세계에선 휘트스톤 경보다 훨씬 억울한 일을 당한 과학자도 많답니다.”

그렇다.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본인의 이름을 걸지 못하고 사라져간 과학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과적인 업적에 스스로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과학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이다. 하지만 과학법칙의 이름이 처음 그 법칙을 발견한 사람의 이름으로 붙여지지 않는 경우는 너무나 많다. 심지어 시카고대학의 통계학 교수인 스티글러는 ‘어떤 과학상의 발견도 원래의 발견자 이름을 따서 명명되지 않는다.’라고 천명했다. 바로 스티글러의 명명법칙(Stigler’s law of eponymy)이다.

가우스분포라고 불리는 정규분포는 1733년 드무아브르가 처음으로 발표했고, 1812년 라플라스가 그 결과를 확장해서 발표했다. 물론 가우스도 이 법칙에 공헌한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실험 오차가 정규분포를 따른다는 가정하에 최소제곱법의 정합성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그것은 드무아브르의 첫 발표가 있고 나서도 한참 뒤인 1809년의 일이다.

예는 이뿐이 아니다. 식중독균인 살모넬라 엔테리카는 1885년에 발견되었다. 이 박테리아의 이름은 발견된 실험실을 운영하던 다니엘 엘머 살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실제로 그는 이 발견에 기여한 것이 없다. 실제 발견자는 티오발트 스미스라는 젊은 연구원이었다. 더 유명한 과학자에게 덜 알려진 학자의 공까지 몰려가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더 나쁜 경우도 있다. 게하르트 아르마우어 한센은 1873년 박테리아를 발견했다. 나병이라 불리던 한센병의 원인이 되는 박테리아였다. 그는 하지만 이 박테리아를 배양하거나 실제로 나병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입증하지 못했다. 한센은 환자들로부터 채취한 많은 샘플을 알베르트 네이서에게 주었는데 네이서는 이 박테리아에 대한 생체 염색을 수행해 1880년 나병의 원인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한센은 이 소식을 듣고 자신이 1870년 이후 수행한 연구에 대한 긴 논문을 발표했다. 결국 학계는 한센의 공로를 인정하고 네이서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말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사이먼 뉴컴은 작은 숫자로 시작하는 숫자들이 9나 8로 시작하는 숫자들보다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숫자들에게 각 숫자가 첫 자리에 나오는 빈도를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법칙을 만들었다. 이 논문은 1881년에 발표되었다. 이로부터 무려 57년 뒤에 물리학자 프랭크 벤포드가 첫 자리 숫자의 특이한 빈도 분포에 대해 발표했다. 벤포드는 뉴컴의 논문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최초의 발견자는 뉴컴이었지만, 법칙은 벤포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이처럼 과학 법칙에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라, 그 발견의 가치를 높인 후대의 과학자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빈번하다. 최초의 발견이 있은 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이름이 붙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명명되더라도 더 유명하고 지위가 높아서 눈에 잘 띄는 사람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다. 전구의 발명가는 에디슨이라고 알려졌지만 실은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하기 1년 전에 영국의 물리학자 조셉 윌슨 스완이 최초의 전구를 발명했다. 에디슨은 상업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구를 발명했다.

“과학탐정, 자네 얘길 듣고 보니 연구 성과에 자기 이름을 걸지 못하는 과학자가 한둘이 아니겠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 방법이 있겠는가?”

“하하.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연구 결과가 쏟아져 어떤 사람이 최초의 발견, 발명자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습니다. 다윈의 ‘종의 기원’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적자생존의 개념을 최초로 발표한 논문은 종의 기원이 나오기 1년 전 1858년 러셀 월러스가 발표한 논문이었습니다. 표절이라는 설도 있지만, 동시에 연구가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열역학 제1법칙에 해당하는 에너지 보존법칙 역시 로베르트 마이어, 헬름홀츠, 제임스 줄 등에 의해 1840년대에 동시다발적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발표가 있으면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공평하게 법칙의 이름을 정하기란 어려워집니다.”

“오호, 그런 경우는 법칙에 사람 이름을 넣을 수가 없겠군. 마이어-헬름홀츠-줄 에너지 보존법칙은 너무 길어서 곤란하겠지.”

“네, 게다가 과학적인 발견은 아무도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오랜 시간을 묻혀 있는 경우가 많지요. 아시다시피 멘델의 유전학 연구는 발표된 지 34년이 지난 뒤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습니다. 후대에 법칙의 이름이 정해질 경우 원래의 최초의 발견자가 누구였는지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으면 잘못된 이름을 붙이기 십상이지요. 누구든 이름을 정하는 사람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갈 과학사의 발견들이니만큼 신중하고 또 신중하게 이름을 붙이길 빌 수밖에요.”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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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이보다 앞서 2005년 말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테슬라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과학자 테슬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계가 이렇게 새롭게 주목을 하는 것일까?

테슬라는 현대 전기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과학향기링크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고주파를 발생시키는 테슬라코일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테슬라코일을 이용하면 물체에 자기장을 걸어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말 개봉한 ‘프레스티지’(Prestige) 영화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이동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테슬라코일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테슬라는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가’ 등의 호칭도 갖고 있다.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의 발명노트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현대 과학기술을 예견하고 아이디어를 준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애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고압 교류로 동물을 죽이는 공개 실험을 하고,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집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했다. 1915년 뉴욕타임즈에 테슬라와 에디슨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결국 둘 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테슬라가 에디슨과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주1)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이를 통해 테슬라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나게 되길 기대한다.
(글 : 남연정 과학전문 기자)


주1) 1T : 1㎡ 당 1Wb의 자기력선속밀도를 가리키는 단위. 자기장에 수직인 단위면적당 자기력선속으로 자기유도 된 정도를 나타낸다.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ndsl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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