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역사]프리스틀리, 과학을 위해 살고 과학을 위해 죽다

산소의 발견으로 유명한 과학의 선구자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1733~1804)의 공식적인 직업은 신학자이다. 1752년부터 1755년에 디벤트리에서 신학뿐만 아니라 역사, 철학, 과학을 공부하고 1755년부터 목사 생활을 했다. 프리스틀리와 같은 신학자가 자연과학 분야에서 빼어난 업적을 냈다는 것이 다소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다.

현재도 여러 가지 일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특히 자연과학과 신학은 아주 동떨어진 분야로 생각한다. 그러나 프리스틀리가 살던 때는 신학과 의학, 법학이 가장 명망 있는 학문으로 인정을 받아 많은 천재들이 신학에 도전했다. 특히 당시 신학자들은 자연 현상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 이유는 자연 현상에서 신의 전지전능함을 입증해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신학생들이 자연 과학에 종사했는데 그들을 ‘자연 신학자’라고 부른다.

프리스틀리는 워링턴에 거주할 즈음부터 과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63년부터 1765년까지는 리버풀의 의사인 터너(Matthew Turner)의 화학 강의를 들었고 1765년부터 해마다 한 달씩 런던에 체류하여 첨단 과학 분야를 섭렵했다. 적은 급료에도 공기 펌프나 과학 기자재를 사들여 실험했다.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1764년부터 1775년까지 영국에 체류하면서 미국의 독립을 위해 동분서주하면서도 시간을 내여 활발한 과학 강연을 했는데, 이때 프리스틀리는 그의 강연을 꼬박꼬박 들으면서 과학에 대한 소양을 키워나갔다. 1767년부터 프리스틀리는 그동안 각계의 학자들이 발표한 자료와 자신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전기학의 역사와 현황>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켜 곧바로 ‘왕립학회 회원’으로 추천되었다. 한마디로 천재가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낸 것이다.

그의 과학 연구가 화학 분야에 집중된 것은 우연히도 그의 집 근처에 양조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양조통에서 공기가 발생하는 것을 관찰하고 이산화탄소(당시는 ‘고정공기’라고 불렀다)에 눈을 돌렸다. 발효된 맥아의 표면에 염산을 가하여 고정공기를 만들어낸 뒤 이를 물에 녹였더니 상큼한 맛을 내는 거품이 발생했다. 그는 거품이 생긴 물이 발포주를 만드는 데 유용할 뿐만 아니라 공기로 선원들이 앓는 괴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틀렸다. 그렇지만 그의 이 실험은 청량음료 산업의 시초인 탄산수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영국왕립학술원’은 그의 공적을 인정해 1773년 그에게 코플리 메달을 수여했다.

프리스틀리를 불후의 과학자로 만들어준 것은 1774년의 연구 때문이었다. 그는 기체를 모을 때 사용되는 수은을 관찰하는 과정에서 다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수은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여 산화수은을 얻은 후 이 화합물을 시험관에 넣고 볼록 렌즈로 모은 태양빛을 쪼이자 어떤 기체가 발생했다. 이 기체 중에서 가연성 물질이 밝은 빛을 내면서 활활 탔다. ‘산소’의 발견이었다.

그는 수소와 산소의 혼합물을 연소시키면 가스가 모두 소비되고 나중에 물방울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실험은 물이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며 원소는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프리스틀리가 산소를 발견하기 전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기체는 고정 공기, 탄산가스 그리고 수소 등 세 가지뿐이었다.

그에게 불후의 명성을 가져다준 산소의 발견은 ‘또 다른 기체는 없을까?’하는 의문으로 발전했다. 그의 예상대로 암모니아, 염화수소, 일산화탄소(연탄가스) 등을 비롯해 10종류의 새로운 기체를 추가로 발견했다. 식물이 큰 틀에서 탄소를 먹고 산소를 배출하는 광합성 원리도 발견할 수 있는 단초가 됐다.

산소의 발견이 과학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의 발견으로 화학혁명을 촉발시키는 원동력이 됐기 때문이다. 즉 산소를 발견함으로써 화학반응에서 원소, 화합물, 물질의 보존을 새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개념들을 통해 오늘날 염료, 플라스틱, 비료, 마약이 탄생했다. 프리스틀리 본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생전에 과학 혁명의 태동을 본 것이다.

프리스틀리가 많은 기체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작고 다루기 손쉬운 장치를 직접 제작하여 소량의 시료로도 정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기체를 연구하기 위해 물로 밀봉한 유리관으로 기체를 분리했는데, 이 방법은 기체가 물에 녹지 않을 때만 가능했다.

그런데 프리스틀리는 물 대신 수은으로 봉하여 기체를 수집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암모니아와 염화수소처럼 물에 잘 녹는 기체가 있음을 발견토록 한 것이다. 그가 과학사에서 크게 인정받는 것은 산소와 같은 기체를 발견한 공로도 있지만 이런 정밀한 실험 기구들을 만들었고, 이것이 후배들의 연구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프리스틀리는 ‘산소’를 발견했음에도 처음엔 그것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1774년 프랑스 파리에 들려 화학자 라부아지에를 만났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공기(산소)에 대해 설명했고, 그 말을 참고해 라부아지에는 추후의 실험에서 그 기체가 비금속 물질과 반응해서 산(acid)을 만든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그 기체를 ‘산을 만드는 원리’라는 뜻에서 ‘산소’로 명명했다.

그러나 산소의 발견은 프리스틀리가 처음은 아니다. 스웨덴의 화학자이자 약사인 칼 빌헬름 셸레가 2년 전에 이미 산소를 발견했지만 발표는 프리스틀리가 빨랐다. 사실 프리스틀리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얼떨결에 산소를 발견한 것이다.

영국 국적의 프리스틀리는 1791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2주년 기념파티의 주최자로 앞장섰다. 이 사실을 영국 국교와 왕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알고 그의 집과 연구실을 기습하여 불태웠다. 그가 가장 아쉬워한 것은 그때 수많은 연구 자료들이 불타버렸다는 것이다. 그는 결국 1794년 미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미국에 도착하자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화학 교수직을 제안했지만 그는 사양하고 노섬벌랜드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그는 손을 대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현재 세계인들을 즐겁게 만드는 청량음료의 아이디어를 집근처 양조장의 이산화탄소(고정 공기)를 보며 도출했고 얼떨결에 생명체에게 가장 중요한 산소를 발견한 것은 물론 암모니아, 염화수소와 같은 새로운 기체를 발견했다.

또한 우연히 물 위에 매달아 놓은 밀폐된 유리그릇 안에 박하 묘목이 멀쩡히 잘 자라는 것을 보고 식물의 광합성 원리를 발견했다. 당시만 해도 동물이나 식물은 신선한 공기가 없는 공간에 오래 갇혀 있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광합성의 발견은 중요한 업적이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지우개를 발명하기도 했다. 문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지구상에서 지우개가 사라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으로 보면 그의 과학적 업적이 남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리스틀리는 1804년 2월 6일, 71세로 사망했는데 그의 사망 원인은 산소를 발견하며 화학 실험에 몰두할 때 마시게 된 일산화탄소와 수은 중독 때문이다. 일산화탄소는 과거에 많은 한국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일명 연탄가스이다. 연탄가스는 한국의 자랑이기도 한 구공탄의 부산물이기도 하며 현재 야외용으로 많이 사용하는 착화탄(일명 번개탄)에서도 많이 나온다.

그가 평생 화학을 위해 바친 희생이 그를 특별히 빛나는 존재로 만들었다는데 의의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의 생명을 담보로 한 것이다. 그는 사망하기 한 시간 전까지도 받아쓰기를 시켜 원고를 수정하고 있었다고 한다.

글 : 이종호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과학저술가

※참고문헌
『문명의 불을 밝힌 과학의 선구자들』, 이세용, 겸지사, 1993
『장난꾸러기 돼지들의 화학피크닉』, 조 슈워츠, 바다출판사, 2002
『신과학사』, 박상준 외, (주)북스힐, 2002
『틀을 깬 과학자들』, 오진곤, 전파과학사, 2002
『유레카』, 레슬리 앨런 호비츠, 생각의나무, 2003
『사이언스 퍼스트』, 로버트 E. 아들러, 생각의 나무, 2003
『생물학과 생물학자 이야기』, 강건일, 참?과학, 2004
『이타적 과학자』, 프란츠 M. 부에티츠, 서해문집, 2004
『거의 모든 것의 역사』, 빌 브라이슨, 까치, 2005
『한권으로 보는 인물 과학사』, 송성수, 북스힐,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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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화학자, 라부아지에

“우리는 사실에만 의존해야 한다. 사실이란 자연이 준 것이라서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실험결과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억지로)진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실험과 관찰이 주는 자연적인 길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을 남긴 인물은 1743년 8월 26일 태어난 프랑스 화학자, 앙투안 로랑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Lavoisier, 1743~1794)다. 객관적인 실험을 중시한 라부아지에는 ‘질량보존의 법칙’ 등 중요한 업적을 많이 남겨 근대 화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는 말년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불운을 맞는다.

라부아지에는 과학계에서 소위 ‘엄친아’였다. 그의 아버지는 유명한 변호사였고 집안은 부유했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법학 공부를 했지만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았다. 1768년 세금징수원이 됐음에도 같은 해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는 등 과학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림 1] 자크 루이 다비드가 1788년 그린 라부아지에와 그의 부인. 사진 출처 : 위키피디아
그가 남긴 업적 중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질량보존의 법칙일 것이다. 이 법칙은 쉽게 말해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전 반응물질의 질량과 화학반응 후 생성된 물질의 질량이 같다는 것이다. 즉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전 물질들은 화학반응 후 생성된 물질들로 변하기 때문에 물질이 소멸되거나 없던 물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부아지에 이전의 과학자들이 화학실험을 할 때 대충 눈짐작으로 반응물질을 다뤘다면, 라부아지에는 정확한 양을 측정해서 객관적인 실험결과를 이끌어낸 것으로 유명하다. 1774년 정립된 이 법칙은 기초과학의 근간이 됐다.

‘산소’를 ‘산소’라 명명한 라부아지에

다른 중요한 업적으로는 연소 반응을 할 때 필요한 기체에 처음으로 ‘산소’라는 이름을 붙이고 원소로 정의했다는 것이다.

사실 산소를 발견한 과학자가 누군지에 대해서는 꽤 논란이 일었었다. 현재 알려진 최초의 발견자는 1772년경 스웨덴의 화학자 칼 빌헬름 셸레다. 1774년에 이와 관련된 내용을 라부아지에에게 편지로 보냈으나 라부아지에는 답장을 하지 않았다. 한편 1774년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도 ‘탈(脫)플로지스톤 공기(비(非)플로지스톤 공기)’라는 이름으로 산소를 발견했다. 라부아지에는 그해 10월 파리를 방문한 프리스틀리를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다.

라부아지에는 프리스틀리가 발견한 기체가 자신이 연구하던 연소와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다. 연소와 관련된 공기의 일부가 이 기체와 대응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체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한 추가적인 실험을 진행했다.

1785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라부아지에는 물의 분석과 합성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는 고열을 이용해 물을 수소와 산소로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며 반대로 수소와 산소 기체를 이용해 물을 합성해 보이기도 했다. 또 물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수소와 산소의 질량을 측정해 보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라부아지에는 물은 원소가 아닌 서로 다른 두 원소의 화합물이란 것을 밝혀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진 라부아지에의 새로운 연소 이론은 단순히 플로지스톤설을 반증했다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왔다. 라부아지에의 연소 이론은 호흡, 발효, 부패 등 산소와 연관된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는데도 도입됐다. 이렇듯 새로운 이론의 도입 후 수많은 산과 염기, 염이 발견됐다. 수많은 화합물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했고 이는 곧 화학적 명명법 정리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원소의 개념 역시 재정립됐다. 그는 원소를 ‘화학 분석이 도달한 현실적 한계’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체계의 확립은 근대화학의 기초를 이뤘다.

하지만 이런 업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세금징수원들이 부패의 온상으로 몰리면서 결국 51세의 나이에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사형 당하기 전 재판장에게 중요한 실험을 할 수 있도록 2주일만 재판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프랑스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며 사형에 처했다. 만일 라부아지에에게 2주일의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 실험은 어쩌면 역사에 남을 훌륭한 연구가 됐을지도 모른다.

라부아지에가 처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 대한 처형이 완전히 그릇됐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천문학자 제롬 랄랑드는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책을 썼으며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공동묘지에 버려졌던 그의 시신을 찾아 매우 성대한 장례식도 치렀다. 하지만 뒤늦은 후회였을 뿐이다. 그의 동료였던 수학자 조제프 루이 라그랑주가 남겼던 한마디가 그의 죽음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실수였는지를 알려준다.

“이 머리를 베어버리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같은 두뇌를 만들기 위해서는 족히 1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다.”

글 : 유기현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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