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백여우 같은 주연이가, 내 남친 원표한테 꼬리를 치더란 말이지?!”

“아이고!! 그렇당께. 아주 꼬리 아홉 달린 구미호가 따로 없더랑께로!”

“고것이 원표 간을 빼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난 원표 맘이 변한건가 걱정만 하고 있었다니깐! 안되겠다. 당장 고 백여우를 혼내줘야지!”

태연과 전라도 출신 짝꿍은 두 주먹 불끈 쥐고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들을 본 아빠는 문 앞에서 아이들을 막고 선다.

“얘들아~ 진정, 진정, 싸우지 말고 대화로 풀어야지. 주연이가 진짜 백여우 짓을 했는지 안했는지 확실치도 않잖니. 그리고 여우는 사람 간을 빼먹는 그렇게 사악하고 못된 짐승이 아니란다. 단지 눈매가 날카롭고, 몸놀림이 매우 날쌘데다, 밤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쁜 이미지를 심어줬을 뿐이지. 심지어 여우는 멸종돼 버린 불쌍한 짐승이란다.

“예에? 하이고, 태연 아부지 뭐라능교? 한 살짜리 얼라가 보는 그림책에도 여우가 있고만, 멸종이 우째 돼요?”

“믿기지 않지? 동화책에 워낙 많이 나오니까 당연히 산에 가면 여우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 토종여우는 벌써 20여 년 전에 멸종되어 버렸단다. 원래는 가장 개체수가 많은 짐승 중에 하나였고, 얕은 언덕이나 물가 즉 인간의 거주지역과 가까운 곳에 주로 서식했었지. 근처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짐승이라서 옛날이야기에도 그렇게 여우가 자주 등장했던 거란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여우털로 만든 목도리와 옷이 대유행을 하면서 여우사냥이 급증한데다, 1960년대 이후 대대적인 쥐잡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여우의 주된 먹이인 쥐가 거의 사라져버렸단다. 그렇게 여우도 덩달아 멸종하게 된 거지. 또 쥐약을 먹고 죽은 쥐를 여우가 다시 먹어서 죽는 경우도 적지 않았단다. 그렇게 한반도에서 여우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게 1989년의 일이야.

“1989년이요? 와, 내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멸종이 됐구나. 불쌍해라. 그럼 지금 동물원에 있는 여우는 다 수입한 거예요?”

“그렇지. 그런데 얼마 전 한국 토종여우 복원 프로젝트가 추진됐단다. 2008년 토종여우 한 쌍을 북한에서 데려다가 국내 동물원에서 키웠는데, 그 여우들이 올 초에 새끼를 낳았거든. 그 아이들에게 야생훈련을 시켜 지난 10월 31일에 소백산에 방사를 했단다.

“야생훈련이라고요? 아니 야생이 아닌데서 우째 야생훈련을 시킨대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사람을 피하는 훈련이란다. 사람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새끼들을 키우고, 가끔 사람이 나타날 때면 콧등에 전기 자극을 주거나 피리를 불어서 도망가도록 훈련을 시키지. 만약 이런 대인기피 훈련을 하지 않으면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농작물에 손을 댈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또 살아있는 닭을 절대로 먹지 않는 훈련도 받는단다. 그래야 야생에 나간 뒤에도 인간이 키우는 닭을 훔쳐 먹지 않거든. 이것 말고도 야생 쥐를 잡아먹는 법이나, 은둔할 장소를 만드는 법 등 배울 것이 아주 많단다. 물론 이런 훈련을 거친다고 자연 방사된 동물이 모두 자연에 잘 적응하고 사는 건 아냐. 불행하게도 10월 31일 소백산에 방사된 여우 한 쌍 중 암컷은 6일 만에 죽은 채로 발견됐단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비가 자주 내릴 때 여우를 방사한 것이 원인으로 지적됐어. 이를 계기로 앞으로는 자연방사에 좀 더 구체적이고 섬세한 계획을 세울 예정이야.”

“하이고, 사람이 참으로 바보같당께라우. 멸종을 안 시키고 잘 보존하면 될 것을 왜 고로코롬 허투루해서 큰 돈 쓰게 맹그나 몰라잉.”

“맞는 말이야. 토종여우뿐만이 아니라, 반달가슴곰과 산양도 복원 중이란다. 지리산에 34마리가 방사된 반달가슴곰은 현재 27마리(출산 8마리, 폐사ㆍ회수 15마리)가 야생 활동을 하고 있는데, 자체 증식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어 야생적응 성공단계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지. 또 2007년부터 월악산에 방사된 14마리의 산양은 이제 38마리로 늘어났다고 하는구나. 원래 90년대 후반에 10마리를 방사했었는데 근친교배로 전멸 위기에 놓여 있다가, 2007년에 다시 복원사업을 시작했고 현재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해 성공적으로 복원이 진행 중이란다.”

“그럼 성공의 기준은 뭐예요? 몇 마리나 야생에 살아있어야 복원에 성공한 거예요?”

국립공원관리공단에 따르면 복원 성공의 기준은 최소 50마리란다. 50마리가 넘으면 추가 방사 없이도 개체수가 유지 혹은 증가될 수 있다는 거지. 공단은 ‘멸종위기종 증식·복원 종합계획(2006)’에 따라서 앞으로 사향노루, 시라소니, 남생이 등 14종에 대한 복원사업도 추진할 예정이란다.”

“하이고, 멸종된 동물은 과학기술로 복원이나 한다카지, 멸종되부런 사랑은 우째 복원한다냐. 원표 마음이 버얼써 몽땅 주연이헌티 가부맀당께. 주연이가 꼬리친 게 아니라 원표가 바람이 났다 그말이여. 이를 우짜고~~!!”

“뭐어~? 아까는 주연이가 구미호라며!! 그럼 원표 마음이 바뀐 거란 말이야?”

“아깐, 니가 허벌나게 맘 상해 할까바 거짓부렁한 것이징….”

“엉엉~ 나는 어떡해 엉엉…. 아빠, 토종여우 복원 말고 원표 마음 복원 프로젝트를 해주세요. 엉엉엉~ 내 첫사랑이란 말이야. 엉엉….”

2012년의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아있던 어느 날, 태연의 첫사랑은 그렇게 떠나버렸다. 과연 태연의 사랑은 언제쯤 다시 복원될 수 있을까?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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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은 광화문. 이층 문루로 이뤄져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기도 안성맞춤이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문양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경복궁의 남측 정문이자 수도 서울의 상징인 광화문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웅장한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광화문에 어떤 일이 있었을까에 대한 궁금증이다. 광화문에는 어떤 사연이 숨어 있고, 옛 모습을 찾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을까?

광화문은 조선 태조 4년(1395년) 창건됐지만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면서 함께 훼손되고 만다. 이후 260년 정도 폐허로 남겨졌다가 고종 1년(1864년)에 이르러서야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런데 대원군이 중건한 광화문은 여러 차례 수난을 겪으면서 원래 모습을 잃게 된다. 대표적인 사건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공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광화문은 총독부 건물의 전면을 막고 있다는 이유로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의 중요 건물인 근정전의 축과 틀어지게 배치됐다는 사실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당시 남산에 있던 일본 신사를 바라보게 한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속뜻은 따로 있었다. 일제는 조선조 정궁의 기본 축을 변형시키고 문을 옮겨서 우리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소행은 창경궁을 동물원으로 만든 행위와 같은 맥락이었다.

건춘문 북쪽에 덩그러니 남겨진 광화문은 한국전쟁 중에 하부의 석조 기단을 제외한 상부의 목조건물마저 소실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968년에 기단은 그대로 사용하고 상부의 건물은 철근콘크리트로 재현했지만 전면에 도로가 개설돼 일제에 의해 왜곡된 광화문의 배치 축과 위치는 바로잡지 못했다. 재료도 철근콘크리트로 복원하게 돼 일제에 의한 정체성 왜곡이 그대로 지속됐다.

결과적으로 광화문은 경복궁의 중심축과 5.6도 틀어지고 후면으로 14.5m 물러나 자리하게 됐던 것이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자는 의견이 모아져 드디어 2006년부터 광화문을 복원하기 위한 철거 작업이 시작됐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섰을 당시의 광화문의 모습(1번)과 한국전쟁 때 목조건물이 소실된 광화문의 모습(2번), 1960년대 콘크리트로 복원된 광화문의 모습(3번), 경복궁의 정문으로 자리하고 있는 광화문의 모습(4번) 자료제공 : 국립문화재연구소>

광화문과 같은 역사적 건축물을 복원할 때는 지켜야 할 원칙이 몇 가지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복원이 증거(evidence)에 의해야 한다는 점이다. 담당자의 추측이나 상상에 의해 복원이 진행되면 원래 건물이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기구도 이런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광화문 복원에 필요한 증거는 충분한 편이었다. 일제강점기의 각종 사진자료와 당시 실측한 도면들이 존재했으며, 조선 후기 경복궁의 궁궐 배치도인 북궐도형도 남아 있었다. 여기에는 각종 건물의 위치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돼 있고 건물의 주칸, 공포형식 같은 기본적인 사항도 기술돼 있어 도움이 됐다.

그러나 이런 간접적인 사료보다 직접적인 자료가 필요하다. 따라서 실제 건물이 위치했던 곳의 발굴조사도 병행됐다. 발굴을 통해 각종 자료를 검증할 수 있었고, 이런 자료들을 토대로 설계도 진행할 수 있었다. 세부적인 건축양식은 경복궁을 비롯해 궁궐에 남아 있는 동시대의 비슷한 유형의 건물들을 참고했다.

이런 자료에도 불구하고 세부 설계에서 증거가 부족해 설계자를 곤란케 했던 것이 ‘현판’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현판은 1960년대에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 현판이다. 하지만 건물을 ‘고종 당시의 것으로 복원한다’는 취지에 비춰볼 때 현판도 원래 것으로 복원하는 게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현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에 우선 일본 동경대에 남아 있는 광화문 사진을 토대로 복원 작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유리건판 광화문 사진에 남아 있는 이미지는 너무 작고 주변 부위가 선명치 않아 그대로 활용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컴퓨터영상처리 기법인 디지털프로세싱을 이용해 글자 형태를 추적하자 복원 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예 전문가들은 이 안을 가지고 수차례 회의를 거쳐 최종 복원 안을 확정했다.

디지털프로세싱 기법은 기존의 아날로그 데이터에서 확실치 않은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해 작업한다. 이미지 데이터를 작은 단위의 픽셀로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더 정확한 이미지 자료를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이런 첨단기술이 도입되지 않았다면 광화문 현판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가진 문화유산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그것의 과거 모습을 모르거나, 제대로 복원하지 못한다면 그 가치가 줄어든다. 광화문처럼 소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리는 데에는 고증과 발굴은 물론 컴퓨터를 활용한 디지털 작업도 필요하다. 앞으로도 발전한 과학기술의 힘으로 우리 문화유산의 가치를 빛낼 수 있기를 바란다.

글 : 김봉건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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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화재로 불타 버린 숭례문에 대해 문화재청은 “2006년 작성해놓은 ‘숭례문 정밀실측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원형 그대로 복구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는 2005년 숭례문 각 부분을 정밀하게 측정한 도면 182장과 1961년 중건 당시 도면 12장이 포함돼 있다. 숭례문에 쓰인 모든 목부재와 기와, 돌의 크기를 mm단위로 쟀을 정도로 정밀하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문화재청의 계획과 달리 숭례문의 완전복원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라고 보는 이가 많다. 숭례문의 기둥과 보로 쓰인 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위층 대들보 위 기둥에 얹혀 있는 마룻보와 고주(高柱, 높은 기둥)는 조선 태조 숭례문 창건 당시의 목재였다. 화재로 불타 버린 숭례문 기둥에 쓰인 소나무는 과연 최고 목질의 나무였을까.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느티나무가 소나무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궁궐이나 중요한 목조건물을 지을 때 많이 쓰였다. 내구성도 느티나무가 더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실제로 경북 경산 임당동 원삼국고분이나 부산 부천동 초기 가야 고분, 신라 천마총, 고려 부석사 무량수전의 기둥 16개는 모두 느티나무가 쓰였다.

박상진 경북대 임산공학과 명예교수는 “건물의 기둥으로 소나무를 사용할 때 100년을 버틴다면 느티나무는 300년은 버틸 수 있다”며 “느티나무의 비중은 1cm³당 0.70∼0.74g으로 소나무의 0.45∼0.50g보다 커서 마찰이나 충격에 훨씬 강하다”고 설명했다. 느티나무 목재는 나뭇결이 곱고 황갈색 빛깔에 윤이 난다. 또 벌레 먹는 일이 적고 다듬기까지 좋아 고급목재로 쓰였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소나무가 널리 쓰였다. 느티나무가 밀려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말기 몽골의 침입이나 무신정변 같은 사회 혼란을 겪으면서 축대벽을 쌓거나 건물을 짓느라 숲 속의 느티나무를 마구 벤 탓이다. 간혹 마을 인근에 느티나무가 자랐지만 이런 나무는 쓸 수 없었다. 울창한 숲 속에서 자란 나무는 ‘콩나물’처럼 곧고 기다란 형태를 지닌다. 반면 열린 공간에서 자란 나무는 키가 2~3m만 자라도 가지가 사방으로 돋아나 기둥으로 쓰기에는 부적합하다.

궁궐이나 사찰 같은 목조건물을 지으려면 10m 이상 곧게 자란 나무가 필요하다. 기둥으로 쓸 수 있는 나무가 필요했던 조선 왕조는 느티나무를 대신해 숲에 늘어난 소나무에 주목했다. 특히 경북 봉화나 울진, 강원지역의 금강소나무나 안면도 소나무는 전봇대처럼 곧게 자라나 이 조건에 맞았다. 그래서 이 지역은 민가에서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출입을 막았다.

곧고 크게 자라는 나무로 전나무도 있다. 하지만, 금강소나무는 나무 바깥쪽의 변재보다 안쪽의 심재가 차지하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 미생물이나 흰개미의 공격에 더 강하다. 심재가 2차 대사산물이나 송진 같은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왕실에서 금강소나무를 궁궐 목재로 고집한 것도 이런 이유다. 특히 금강소나무는 다른 소나무보다 단단하다. 생장이 더뎌 나이테가 촘촘하기 때문인데, 가령 다른 나무가 1cm 자라는 데 1년이 걸린다면 금강소나무는 3년이 걸릴 정도다.

나무의 강도로 치자면 도토리가 열리는 참나무가 으뜸이다. 참나무는 전국 어디서나 자생하기 때문에 목재를 구하기도 쉽다. 그러나 참나무는 비중이 1cm³당 0.8g으로 너무 무겁다. 비중이 크면 목재가 단단해서 대패질이나 톱질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른다. 건축 자재로 이용하려면 적당한 강도와 가공하기 편리해야 한다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현재 지름 1m가 넘는 금강소나무가 국내에 별로 없으며, 있어도 개인 소유로 정부가 활용하기 쉽지 않다. 금강소나무를 구하지 못해 숭례문 복원이 쉽지 않게 되자 일부에선 ‘더글러스 퍼’(Douglas-fir)란 나무를 수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 자라는 더글러스 퍼는 금강소나무와 재질이 비슷하며 색상이 붉어 정서적으로 비슷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숭례문 복원에 외국에서 자란 목재를 쓴다는 것은 국민정서에 맞지 않은 측면이 있다.

이웃나라인 일본에선 궁궐의 보수나 복원을 위해 별도의 숲을 관리하고 있다. 가령 일본에서 3대 아름다운 숲으로 꼽히는 기소지방의 편백나무림은 일본 왕가의 조상신을 모시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보수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고자 마련된 곳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산림청이나 문화재청이 앞장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할 때이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ndsl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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