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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물리학의 아버지, 근대 과학의 아버지, 과학의 아버지 등으로 칭송되며 뉴턴과 아인슈타인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갈릴레이는 그 인기만큼 널리 알려진 이야기도 많지만 그 이야기 중 많은 것이 사실과 다르거나 과장되어 있다. 과학의 역사를 통틀어 갈릴레이만큼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신화가 되어 사실로 널리 받아들여진 경우는 드물다. 그렇다면 갈릴레이의 이야기에 이렇듯 과장이나 거짓이 많은 이유는 무엇이며 과연 이야기의 진실은 과연 무엇일까?


갈릴레이는 셰익스피어와 같은 해인 1564년에 이탈리아 피사의 몰락한 귀족인 빈센초 갈릴레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재다능했던 갈릴레이는 음악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류트와 오르간 연주에 재능을 보였으며, 문학에 대한 논문을 쓸 정도로 학식이 풍부했다. 또한 미술에는 당시 뛰어난 화가들도 그의 실력을 인정할 만큼 조예가 깊었다. 이렇게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갈릴레이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수학 개인교사의 길이었다. 갈릴레이는 피사 대학에 다니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논쟁을 즐겼기 때문에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성향은 결국 그를 종교재판에 이르게 만든다.


흔히 갈릴레이가 천동설을 부정하고 지동설을 주장했기 때문에 종교재판에 회부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즉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이 교회와 과학과의 갈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만일 그랬다면 코페르니쿠스주의를 주장한 갈릴레이보다는 코페르니쿠스가 종교 재판에 회부되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비록 코페르니쿠스의 책이 금서가 되기는 했지만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지 않았다. 심지어 교회 지도부 내에서도 갈릴레이의 생각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따라서 갈릴레이가 종교재판에 회부된 이유를 진실에 대한 교회의 탄압이라고 보는 견해는 지나치게 사건을 단순화시켜 그 본질을 왜곡시킨 것이다.


역사적 추론에 의하면 갈릴레이는 예수회의 음모에 빠지게 되었거나 단순히 그의 책 표지에 있는 돌고래 문양이 오해를 받아 종교 갈등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게 했을 수도 있다. 돌고래를 뜻하는 돌핀(dolphin)은 프랑스의 황태자를 가리키는 도핀(dauphin)을 뜻하기도 했다. 당시 프랑스는 신교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교를 지지하는 예수회 입장에서는 그 그림을 반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돌고래 문양은 단지 갈릴레이의 책을 출판한 회사의 심벌마크였을 뿐인데 신교도와 구교도가 대립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그런 오해가 생겼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갈릴레이의 책이 자신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한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시키게 된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갈릴레이는 고문과 화형의 위협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했으며, 갈릴레이는 재판장을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속삭였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교회는 70살의 병든 늙은이였던 갈릴레이를 고문하지 않았으며, 단지 암시적인 고문의 위협만 가했을 뿐이다. 고문과 화형의 위협에 의해 병들고 늙은 갈릴레이가 굴복한 것으로 보이게 만든 것은 이야기꾼들이 이 사건을 교회와 과학의 갈등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다. 또한 갈릴레이는 재판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을 스스로 철회했기 때문에 저 유명한 대사를 내뱉지 않았으며, 이런 위험한 말을 함부로 할 만큼 갈릴레이는 무모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갈릴레이는 지극히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직접 망원경을 만들었다. 망원경을 원로원에 제출하여 멀리서 들어오는 배를 먼저 발견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많은 상금을 받았다. 또한 자신의 망원경으로 관측하여 출간한 ‘별의 메시지’라는 뜻의 <Siderius Nuncius>라는 책을 자신의 제자인 메디치가의 코시모 2세에게 바쳤다. 이 책에서 갈릴레이는 자신이 발견한 목성의 위성 4개에 ‘메디치의 별’(물론 오늘날에는 갈릴레이의 이름이 붙여졌지만)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화려한 문장으로 헌정의 말을 적었다. 이 헌정사를 읽어 보면 갈릴레이는 아부의 지존이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갈릴레이에 대한 과장된 전설은 이뿐 아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실험인 피사의 사탑 실험도 그가 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갈릴레이는 물체의 무게에 상관없이 모든 물체는 동시에 낙하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1590년 피사의 사탑에서 공개 실험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실험에 대한 기록이 갈릴레이의 저서 어디에도 남겨져 있지 않다. 다만 공개 실험이 있은 지 거의 50년이나 지난 1638년 출간된 갈릴레이의 저서 <신과학의 대화> 속에 100m 높이에서 포탄과 총알을 같이 떨어뜨리면 1스판(약 20cm) 정도로 거의 동시에 떨어진다는 기록이 전부이다. 실제 이러한 실험을 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물리학자인 사이먼 스테빈(Simon Stevin)이다. 1586년 스테빈은 10m 높이의 2층 창에서 무게가 다른 두 물체를 떨어뜨린 실험을 했다.


이 이야기는 갈릴레이를 너무나 존경했던 제자 비비아니(Vincenzo Viviani)가 스테빈의 실험을 스승의 것으로 포장해 갈릴레이의 전기 속에 넣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피사의 사탑 실험은 스승에 대한 지나친 존경심이 빚어낸 과장된 이야기인 것이다. 또한 진자의 등시성에 얽힌 이야기도 비비아니의 각색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 비비아니에 의하면 당시 19세였던 갈릴레이는 피사대학에서 예배를 보는 것을 지루하게 느끼고 있었는데, 때마침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흔들렸다. 이 흔들린 샹들리에를 보고 자신의 맥박을 이용해 진자의 등시성을 알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성당에 샹들리에가 설치된 때는 갈릴레이가 19세였던 해로부터 4년 후인 1587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과 달리 갈릴레이의 신화가 무너진다고 해서 그의 업적을 폄하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우리는 신화화된 영웅이 아니라 인간적인 모습에 한층 더 정을 느끼게 된다.


글 : 최원석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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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3월 14일을 화이트데이로 생각하지만 이 날은 과학사에서 아주 중요한 날이다. 시사잡지 타임이 20세기 최고의 인물로 선정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죽은 뒤에 그의 뇌조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 정도로 천재과학자로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뇌에는 신경세포의 활동을 돕는 아교세포가 다른 사람보다 월등히 많아 이것이 천재성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지만 그의 뇌는 1.23㎏으로 성인 남성의 평균인 1.4㎏보다 가볍고, 성인 여성의 평균인 1.25㎏과 비슷했다. 또 잘 알려진 것처럼 유년 시절에 낙제를 할 정도로 공부를 썩 잘하는 편도 아니었다. 만 30개월이 될 때까지 말을 못했다는 믿기 어려운 일화도 전해진다. 어느날 갑자기 “우유가 너무 뜨겁다”고 말을 해, 부모가 “왜 지금껏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말할 필요 없이) 괜찮아서”라고 답했다고 한다.

천재로 알려진 아인슈타인도 그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매우 평범하다. 어릴 때 어머니의 강압에 못이겨 억지로 바이올린을 배운 그가 나중에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문제를 풀기도 하고, 인도주의적 행사를 돕기 위해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으니 말이다. 또 사생활에서는 "95% 정도의 남녀는 천성적으로 일부일처제에 어울리지 않으며 단지 즐기기를 선호한다"고 말할 정도로 책임감과 도덕성이 부족한 행동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905년 3월 광양자 가설, 5월 브라운 운동, 6월 특수상대성 이론이라는 3가지 획기적인 이론을 발표해 과학사에서 1905년을 ‘기적의 해’로 불리게 만들었다. 이중 6월에 발표된 특수상대성 이론은 이미 모든 것이 결정돼 있다는 결정론적 세계관에 갇혀있던 인류에게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시간여행이 가능할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빛보다 빠르면 시간여행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은 여러 가지 난제에 부딪혀 현재까지의 과학 이론과 기술로는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학향기링크

현재까지 빛은 가장 빠르며 속도가 일정하다고 알려져 있다. 빛의 속도는 일정 시간 동안 이동한 거리의 비로 얻어진 값이다. 그런데 빛이 이동하는 거리를 줄이거나 늘리면, 빛 속도가 일정해야 하므로 변하는 거리에 따라 시간도 달라져야 한다. 이처럼 거리가 변함에 따라 시간도 상대적일 수 있다는 것이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이다.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거리)이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함께 움직이는 시공간을 만들어냈다. 시공간의 상대적 차이에 따라 관측자마다 똑같은 현상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우주여행을 하면서 지구에 있는 친구에게 1분마다 소식을 보낸다. 이때 우주선이 지구와 멀어지면서 빛의 속도에 가깝게 여행할수록 우주선에서 1분마다 보내는 소식의 간격이 지구에서는 1분보다 더 길어지게 된다. 우주선의 시계는 일정한 속도로 가고 있지만 지구에서 이를 측정하는 관측자에게는 매우 느리게 가고 있는 것이다.

특수상대성이론에서 빛은 질량을 가지지 않아 빛은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일반상대성이론에서는 움직이는 시공간이 휘어져 있기 때문에 빛도 휘게 된다. 빛도 휜다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은 영국의 천문학자 에딩턴이 일식 때 별빛이 태양 중력에 의해 휜다는 사실을 밝힌 뒤에야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제한적인 조건에서만 상대성이론이 적용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인 상황에서도 적용될 수 있게 이를 업그레이드한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 하면 상대성이론을 떠올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그가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상대성이론은 당시로는 획기적인 생각이어서 인정받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업적은 광양자 가설이다.

‘빛은 입자일까 파동일까’라는 수천년을 이어온 빛의 본성에 대한 이 질문에 어느 쪽도 완승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 ‘물리학 연보’에 ‘빛의 창조와 변화에 관한 과학적 관점에 대하여’라는 입자론을 지지하는 논문을 제출했다. 그는 논문에서 빛이 광자(photon)로 불연속적으로 운동한다고 주장했다. 에너지가 흡수됐다가 방출될 때 입자로만 이뤄진다는 플랑크의 연구에 주목하던 아인슈타인은 가열된 물질의 에너지가 빛으로 바뀔 때 빛 에너지가 입자상태라고 가정해야 설명이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여기서 도입된 것이 빛 양자로 그의 논문이 ‘광양자 가설’로 불리는 이유다.

아인슈타인의 광양자 가설을 이용하면 금속표면에 적외선을 쪼이면 나오지 않는 전자가 자외선을 쪼이면 튀어나오는 광전효과를 설명할 수 있다. 파동이론에 따르면 적외선이든 자외선이든 빛을 쪼이면 입자가 튀어나와야 했다. 1922년 당시 학자들 사이에서 광양자 가설의 타당성에 대해서 회의적인 분위기에서도 아인슈타인은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빛은 정확하게 보면 입자도 파동도 아닌 제3의 형태를 가진다. 다만 제3의 형태가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입자나 파동이라는 형태로 바꿔서 생각하고 설명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의 말 중에서 “신은 우주를 가지고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이 말은 우연성에 영향을 받아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양자역학의 불완전성을 부정적으로 바라본 아인슈타인이 양자역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 충고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보어는 오히려 “신이 왜 주사위놀이를 하는지를 생각해보라”고 충고했다. 결국 아인슈타인의 생각이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 우리는 여기서 천재도 모든 것을 다 알거나 정확하지 않다는 단순한 진리를 얻는다. (글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ndsl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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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주간지 ‘라이프 매거진’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중의 한 사람으로 니콜라 테슬라(Nikola Tesla)를 꼽았다. 이보다 앞서 2005년 말 크로아티아는 테슬라 탄생 150주년을 맞아 2006년을 ‘니콜라 테슬라의 해’로 정했고, 세르비아는 2006년 3월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이름을 ‘테슬라 공항’으로 바꿨다.

테슬라를 두고 미국, 크로아티아, 세르비아가 서로 자기 나라의 발명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인으로 젊은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테슬라의 특이한 이력 때문이다. 과학자 테슬라,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세계가 이렇게 새롭게 주목을 하는 것일까?

테슬라는 현대 전기문명을 완성한 천재 과학자다. 현대 전기 문명의 근간이 되는 교류를 발명했으며, 수많은 전기 실험으로 ‘거의 모든 현대기술의 원조’라는 칭호를 갖고 있다. 시대를 앞선 과학적 통찰력과 독특한 삶 덕분에 많은 문학과 영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다. 과학향기링크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교류발전기와 송·배전 시스템은 웨스팅하우스사(社)에서 일하면서 만들어냈다. 교류는 전기가 흐르는 방향이 주기적으로 바뀌는 전기다. 직류에 비해 적은 손실로 전류를 보낼 수 있는 장점이 있어 현대 전기 문명을 일으킨 원천기술이다. 이 발명은 1895년 웨스팅하우스사가 나이아가라 폭포에 교류발전기를 사용한 수력발전소를 만들면서 빛을 보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컴퓨터, 인터넷은 등 수많은 전기문명이 테슬라의 교류 전기시스템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1891년에는 유명한 테슬라코일(Tesla Coil)을 제작했다. 테슬라코일은 간단한 장치로 수십만 볼트의 전압을 만들어내는 장치다. 당시 60Hz에 불과했던 가정용 전기를 수천Hz의 고주파로 바꾸며 엄청난 고전압을 발생시킨 것이다. 이를 사용해 테슬라는 최초의 형광등과 네온등도 만들었다.

고주파를 발생시키는 테슬라코일은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심지어 테슬라코일을 이용하면 물체에 자기장을 걸어 순간이동 시킬 수 있다는 황당한 이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지난해 말 개봉한 ‘프레스티지’(Prestige) 영화를 보면 마술사 로버트가 순간이동마술을 펼치기 위해 테슬라를 찾아가 테슬라코일을 얻는 장면이 나온다. 테슬라코일의 유명세와 신비주의를 따르는 추종자 덕분에 테슬라는 ‘몽상가’ ‘미친 과학자’ ‘마술가’ 등의 호칭도 갖고 있다.

또 테슬라는 한 발 앞선 발명가로 현대 과학기술의 발전 방향을 알려 줬다. 그가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후대 과학자들이 테슬라의 이론으로 만들어낸 기기들은 무궁무진하다. 그는 테슬라코일을 이용한 실험 도중 라디오 신호를 같은 진동수로 공명시키면 송수신이 가능해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원리는 현재 라디오나 TV 등에 응용돼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무선조종장치를 연구하던 테슬라는 현대 로봇의 가능성도 언급했다. 제 1차 세계대전 무렵 잠수함을 탐지하는 아이디어를 냈는데 2차 대전에서 레이더로 실용화됐다. 지금도 수많은 과학자들은 그의 발명노트를 열심히 들여다보며 아이디어를 얻으려고 하고 있다.

테슬라의 발명을 헤아리자면 끝이 없다. 그는 전기기계용 전류전환장치, 발전기용 조절기, 무선통신기술, 고주파기술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전기시스템을 획기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리고 전자현미경, 수력발전소, 형광등, 라디오, 무선조종보트, 자동차 속도계, 최초의 X선 사진, 레이더 등도 그의 작품이다.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현대 과학기술을 예견하고 아이디어를 준 테슬라는 그의 업적만큼 살았을 때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라이벌이었던 에디슨 때문에 그의 업적은 많이 가려졌다. 1882년 테슬라가 에디슨 연구소에 들어가 발전기와 전동기를 연구할 때부터 에디슨은 천재적인 테슬라의 재능을 질투에 불타는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애초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전기를 싼값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하면 거액을 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테슬라는 에디슨의 직류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며 교류시스템을 만들었다. 하지만 에디슨은 테슬라에게 돈을 주기로 한 약속을 어겼고, 테슬라는 에디슨에게 사표를 던진다.

직류방식을 고집한 에디슨은 테슬라의 교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기 위해 고압 교류로 동물을 죽이는 공개 실험을 하고, 교류 전기의자로 사형집행을 했다. 이 과정에서 테슬라는 교류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자신의 특허권을 포기하기도 했다. 1915년 뉴욕타임즈에 테슬라와 에디슨이 노벨물리학상 공동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기사가 났지만 결국 둘 다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데, 테슬라가 에디슨과 함께 상 받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기이한 삶처럼 그의 성격도 특이했다. 식사 전 광택이 나도록 스푼을 닦아야 하는 결벽증이 있었고, 손수건은 하얀 비단으로 된 것만 썼다. 호텔방의 호실은 3의 배수여야만 했고, 비둘기에 집착해 말년 그의 호텔방에는 비둘기 새장이 가득했다고 한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발명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테슬라는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히 숨을 거뒀다.

그러나 세상은 시대를 앞서갔던 테슬라를 잊지 않았다. 1961년 국제순수 및 응용물리학 연맹(IUPAP)의 표준단위 및 그 정의에 관한 위원회는 자기장의 세기를 나타내는 단위로 테슬라의 이름을 딴 T(Tesla)주1)를 쓰기로 했다. 전기를 이용한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었던 테슬라의 이름에 걸맞는 단위라 하겠다. 이를 통해 테슬라의 이름도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살아나게 되길 기대한다.
(글 : 남연정 과학전문 기자)


주1) 1T : 1㎡ 당 1Wb의 자기력선속밀도를 가리키는 단위. 자기장에 수직인 단위면적당 자기력선속으로 자기유도 된 정도를 나타낸다.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ndsl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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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과학자를 모델로 우표를 발행한 적은 없다. 그러나 북한은 두 차례나 한 명의 과학자를 기념한 우표를 발행했다. 바로 합성섬유인 ‘비날론’의 발명자 고 리승기 박사(1905~1996)가 주인공이다. 리 박사는 1960년대 초반까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크게 이름을 떨친 과학자로, 북한에서는 이례적으로 그에 관한 대중용 전기가 출판될 정도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리 박사는 190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마츠야마고등학교를 나왔다. 그 뒤 1931년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졸업했다. 훗날 그가 쓴 자서전에 따르면 가난한 형편 탓에 대학 시절 결핵을 앓기도 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쳤다고 한다.

원래 리 박사가 연구하기 원했던 분야는 합성섬유였지만 조선인 출신이 일본에서 직장을 얻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지도 교수였던 기타(喜田)의 추천으로 처음에는 아스팔트를 연구하는 회사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아스팔트와 관련한 다수의 특허를 취득하는 성과를 올린 리 박사는 곧이어 자신이 원하던 합성섬유를 연구할 기회를 잡는다. 바로 교토제국대 부설 일본화학섬유연구소에 연구강사로 임용된 것이다.

1938년 미국 듀퐁사가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을 개발하면서 세계 각국에 합성섬유 연구 열풍이 불었다. 원래 세계적인 비단, 면직물 수출국이었던 일본도 합성섬유 연구에 뛰어들었다. 미국과 달리 일본은 폴리비닐알콜(polyvinylalcohol, PVA)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을 원료로 쓸 수 있는지 연구했다. 나일론은 석유를 원료로 필요했지만 폴리비닐알콜은 석회석을 원료로 했기 때문에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에 적합했다. 또 PVC로 만든 합성섬유는 나일론이나 아크릴 섬유에 비해 수분을 흡수하는 성질이 뛰어나 면직물을 대용하는데 유리했다.

마침내 1939년 리 박사는 PVC로 ‘합성섬유 1호’를 개발했다. 합성섬유 1호는 단순한 개인적인 영광 그 이상의 것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리 박사가 거둔 성공은 조선인의 자랑이 되기에 충분했다. 과학잡지 ‘과학조선’은 조선인 과학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리승기를 지목했고, 종합잡지 ‘조광’(朝光)도 ‘세계의 학계에 파문을 던진 합성1호의 기염-리승기 박사의 고심 연구달성’(1939년 12월호)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이를 두고 리 박사는 자서전에서 제11회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를 거론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가 일본 과학의 성과로 귀속된다는 사실에 무척 안타까워했다. 게다가 리 박사의 연구가 공업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기는 했지만 완전한 실용화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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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합성섬유 1호는 뜨거운 물에 닿으면 쉽게 수축됐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리 박사는 제조 공정 중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는 방법을 고안해 1942년 무렵까지 합성섬유 1호의 대부분 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연구가 서둘러 상업화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것은 당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을 벌이고 있어서 자신의 연구가 전쟁 수행을 위한 군수품 생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결국 리 박사의 의도대로 합성섬유 1호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상업화에 들어가지 못했다.

한편 리 박사는 헌병에게 “일본은 패망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빌미로 일본 오사카 감옥에 갔다가 거기서 광복을 맞았다. 고국으로 돌아온 리 박사는 서울대 공대학장, 대한화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지만 얼마 뒤인 1950년 7월 31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떠나 평양에 간다. 리 박사의 월북 배경을 둘러싸고 어떤 이들은 그가 사상적으로 공산주의에 기울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네다섯 차례에 걸친 끈질긴 월북 권유를 물리쳤고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이념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하지 않은 사람이다.

다만 당시 남한은 과학자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던 반면 북한은 해외에 거주한 조선 과학자까지 초빙해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적극 지원했다. 아마 리 박사에게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에서의 근무와 비날론연구소 설립을 제안한 것이 그가 월북한 가장 큰 요인으로 추측된다. 흥남의 질소비료공장은 당시 세계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대공장으로, 카바이드와 아세틸렌, 아세트산, 아세트알데히드 등을 생산했다. 이들은 모두 합성섬유를 만드는 원료였다.

김일성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1961년 연간 2만톤의 비날론을 생산하는 공장이 완공됐다. 석회석과 무연탄, 전기를 이용해 만든 카바이드를 기본 원료로 삼아 만드는 비날론(Vinalon)은 비닐알코올을 축약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비닐론(Vinylon)이라 불린다. 그 뒤 ‘주체사상’이 담론으로 등장하면서 비날론은 ‘주체섬유’로 불릴 만큼 획기적인 성과였다.

무엇보다 비날론은 조선인인 리 박사가 개발했고, 질감이 조선의 전통 옷인 면과 비슷하며, 북한에 풍부하게 매장된 석회석을 원료로 이용한다는 점에서 북한의 공업화와 체제 건설의 역사와 나란히 서술되고 있다. 북한 정권은 리 박사에게 노력영웅 칭호와 제1회 과학부문 인민상을 수여했다. 병으로 드러누웠을 때 김일성이 그에게 100년 된 산삼을 보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역사에서 ‘만약’이란 가정은 무의미하지만 광복 이후 남한에서 과학자를 우대했다면 리 박사가 서울대 응용화학과에서 길러낸 제자들과 함께 집단으로 월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는 미군정이 한국을 일본의 영토로 간주해 서울대의 학제개편을 미국식으로 강요한 탓에 담양으로 낙향했을 때도 “아편쟁이가 아편을 잊지 못하듯 비날론을 잊을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국인 과학자의 해외 두뇌유출을 걱정하는 것처럼 과학자에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일은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글 : 서금영 과학칼럼니스트)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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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말 저녁에 드라마 ‘대왕 세종’이 방영 중이다. 흔히 세종대왕을 한글을 창제한 왕 정도로 생각하는데, 그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계에서는 세종 시대 조선의 과학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할 정도다. 이런 평가가 가능한 이유는 당시 장영실과 같은 우수한 과학기술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학사학자들은 조선 세종 때 장영실보다 뛰어났던 과학기술자가 있다고 한다. 누굴까?

과학사학자들에 따르면 장영실이 노비출신 등 극적인 개인사 때문에 일반인에게 최고 인기 과학자가 됐다고 한다. 하지만, 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세종 시대 최고 과학자로 ‘이순지, 이천, 정인지’를, 김근배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이순지와 이천’을 꼽았다. 이 중 이천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여러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한 과학기술자다.

특이하게도 이천은 원래 학자가 아닌 ‘무인’ 출신이다. 그는 고려말 1376년에 태어나 조선을 건국한 태조 시절에 무과 급제해 10대 후반에 무인의 길에 들어섰다. 무인이던 그가 태종, 정종 때까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떻게 과학기술자로 나서게 됐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가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 세종 때의 기록은 잘 남아 있다. 1418년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던 해에 이천은 공조 참판으로 재직하면서 왕실 제사에 사용되는 제기를 만들었다. 당시 왕실에서 사용하던 제사 그릇인 제기는 쇠로 만들었는데, 이천이 만든 제기는 이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정교했다. 이 제기를 눈여겨본 세종은 곧바로 이천을 불렀다.

세종은 이천이 쇠를 다루는 천재적인 기술을 가진 것을 알아보고 기존의 활자를 개량하는 일을 맡겼다. ‘쇠를 떡 주무르듯’ 다루는 이천이었지만 활자 제작 기술은 처음이었고, 전혀 알지 못했다. 이에 이천은 김돈, 김빈, 장영실, 이세형, 정척, 이순지 등 당시 과학 기술자들을 동원하여 공역을 관장하며 새 활자 개발을 위해 온갖 연구를 거듭했다.

금속활자 인쇄기술은 조선시대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선 태종 때 주자소를 세우고 청동으로 만든 금속활자 ‘계미자’(癸未字)를 제작했다. 하지만,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친 기술적 문제가 있었다. 특히 활자를 고정하는 밀랍이 녹으면서 글자가 쏠리고 비뚤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활자 개량에 나선지 2년 만인 1420년 새로운 활자 ‘경자자’(庚子字)가 만들어졌다. 이천은 밀랍 대신 녹지 않는 대나무를 끼워 넣는 획기적인 신기술을 개발해 인쇄할 때 활자가 밀리지 않도록 했다. 그는 이를 개량하고 발전시켜 더 완벽해진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어냈다.

당시 하루에 인쇄할 수 있는 최대 장수가 4장이던 활자 기술을 갑인자는 하루에 40장을 찍어낼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발전시켰다. 갑인자는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높아졌다. 현재 ‘갑인자’로 찍어 낸 ‘대학연의’와 같은 책은 15세기에 전 세계에서 제작된 인쇄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적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세종은 책을 통해 높은 수준의 학문을 백성에게 전파하고자 금속활자에 관심을 뒀다.

15세기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 천문의기 제작의 총책임을 맡았던 과학기술자도 바로 이천이다. 그는 장영실과 함께 혼천의와 간의를 비롯한 일성정시의 등의 해시계를 제작했다. 간의와 앙부일구 등의 기기를 정인지와 정초가 설계하면 이를 최종적으로 만드는 일을 이천이 담당해 훌륭한 결과물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종이 궁에 설치한 천문대인 간의대는 당시 세계 최고의 천문대로 학계에서 평가받는데, 이 간의대를 건축한 이도 이천이다. 천문 관측 기기 제작에 대한 이천의 업적은 금속활자 업적보다 더 높게 평가되기도 한다.

세종 시대 과학기술의 밑바탕이 된 도량형의 표준화도 그가 이룩한 중요 성과다. 그는 저울을 개량해 전국 관청에 나눠줬다. 이 저울은 전국 관청에서 세금을 부과할 때 등 다양하게 사용돼 저울 문제로 발생할 수 있는 논란을 줄였다.

이천은 도성을 쌓는 건축술, 군선이나 화포 개량 같은 군사 분야, 하물며 악기 제조에까지 그의 기술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대마도를 정벌할 때에 사용하고자 선체가 크면서도 빨리 달릴 수 있는 쾌속선을, 물에 잠기는 부분이 썩지 않도록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인 갑조법을 개발했다. 평안도 절제사로 지내면서는 조선식 대형포인 조립식 총통완구를 독창적으로 개발했다. 또한, 박연과 더불어 금, 솔, 대쟁, 아쟁, 생, 우회 등 많은 악기를 만들고, 무희와 악공들의 관복을 제도화하는데도 앞장섰다.

이렇게 이천은 수많은 발명품 뒤에서 뛰어난 기술로 공을 세웠다. 그는 문종 1년인 1451년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무인이면서 놀라운 기술력을 지녔던 천재적인 과학기술자 이천, 그는 ‘갑옷 입은 과학기술자’였다.
(글 : 박응서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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