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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10.22 화가들의 녹색 요정, 압생트
영화 ‘토탈 이클립스(Total Eclipse)’는 프랑스의 시인 폴 베를렌느(Paul Verlaine)와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의 동성애적 사랑을 그린 영화로 유명하다. 지금에야 ‘미드나잇 카우보이’나 ‘왕의 남자’처럼 동성애에 대한 영화가 흔하지만, ‘토탈 이클립스’가 개봉되던 1995년만 해도 프랑스의 두 시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파괴적인 동성애 행각은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또 당시 최고의 하이틴 스타였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천재 시인 랭보로 등장한 것 역시 적잖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영화에서 랭보로 분한 레오나르드 디카프리오는 녹색의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있다. 이 녹색 술이 19세기를 풍미했던 압생트(Absinthe)란 술이다. 이 술은 1750년대에 스위스에서 처음 제조되어 19세기 중엽에는 전 유럽에서 인기있는 술이 되었다. 모파상, 마네, 피카소, 고흐 등 낭만주의 시인과 화가, 소설가들이 압생트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런데 낭만주의 예술가들에게 압생트가 이토록 인기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녹색과 사과 맛 브랜디라는 압생트 특유의 멋도 있지만, 이 술 안에 투존(Thujone)이라는 환각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투존은 중추신경에 심각한 장애를 동반하며, 지각장애와 정신착란 그리고 간질과 유사한 발작을 일으켜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 성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압생트의 환각성분은 화가들의 예술적 정서를 풍성하게 해주는 역할도 했었다.

물에 희석해 마시는 압생트는 탁한 녹색을 띠며 쓴맛이 난다. 압생트 애호가들은 이 쓴맛을 해결하기 위해 ‘압생트 숟가락’이라는 특별한 은수저를 사용했다고 한다. 먼저 압생트 숟가락을 잔에 걸치고 그 위에 각설탕을 올려놓는다. 이 위로 압생트를 조금 부은 후에, 차가운 물을 서서히 부으면 각설탕 녹은 물이 흘러내려 녹색의 압생트와 섞여 불투명한 액체가 된다. 술의 도수를 희석시킬 뿐만 아니라 쓴맛도 제거해주는 셈이다. 화가들은 흔히 이 절차를 예술 또는 신성한 종교의식에 비유했다. 이처럼 독특한 압생트 희석 방법도 예술가들이 압생트에 매료되는 데에 한몫을 했다.

그 때문에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소설과 그림을 살펴보면 압생트에 관련된 에피소드를 여럿 찾아낼 수 있다. 19세기 파리에는 예술가들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일과 후 카페로 몰려가 늦은 시간까지 압생트를 마시곤 했다. 그래서 늦은 저녁 시간을 ‘녹색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알버트 간트너(Albert Gantner)라는 화가는 압생트의 금지를 희화하는 ‘녹색요정의 종말(The end of the Green Fairy)’이라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독특한 작품세계로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는 압생트를 즐겨 마신 나머지 심각한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였다. 압생트에는 시신경을 손상시키는 테르펜(terpene) 유도체가 함유되어 있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후기로 갈수록 시각장애나 알코올 중독, 정신착란의 징후가 발견되는데 이처럼 독특한 고흐의 색감에 압생트도 한몫한 셈이다. 특히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머물렀던 아를(Arles)에서 탄생한 그림들에는 기묘하게 혼합된 노랑과 파랑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금단현상에 시달리던 고흐는 물감희석용으로 쓰이는 테레펜틴(turpentine)을 마시려 한 적도 있다고 한다. 테레펜틴에 압생트 성분 중 하나인 투존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생트의 중독 성분 때문에 유럽 각국은 20세기 들어 대부분 압생트의 제조와 판매를 금지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던 압생트가 20세기에 들어 잊혀진 술이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압생트에 대한 새로운 연구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즉, 압생트가 화가들을 괴롭힌 치명적인 중독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아니라는 점이다. 독일, 영국, 미국의 국제공동연구진은 압생트에 들어 있는 투존이 이러한 증세의 원인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생트가 치명적 독성을 띠고 있다는 소문이 난 데에는 압생트 판매량이 와인 판매량을 초과하자 이를 경계한 프랑스의 와인 제작자들의 로비가 한몫을 했다고 한다. 압생트 제조가 금지되던 20세기 초에는 과학적 분석을 통해 투존의 함량을 측정하기보다는 적당히 예측한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 화학자들은 압생트의 투존 함유량을 350mg/L(여전히 독성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한 양이 아님)이라고 추정했는데, 현재의 기술로 같은 압생트의 투존 함량을 정확하게 측정해보면 고작 5mg/L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와 함께 연구진은 압생트에 든 독성의 다른 원인을 찾기 위해 메탄올과 알코올, 알데히드의 양을 기체 크로마토그래피로 측정하고, 원자 흡수 분광법으로 구리를, 플라즈마 질량분석기로 안티몬의 양을 측정했다. 이 결과 역시 비교적 깨끗하며 불순물의 양이 거의 없었다. 압생트를 사랑했던 예술가들이 건강을 잃었던 이유는 압생트의 독성 때문이 아니라 알코올 중독 때문이었던 것이다.

여러 연구 결과와 압생트 팬들의 청원에 힘입어 1988년 마침내 압생트 금지법이 폐지되었다. 이와 함께 일반적인 주류에는 35mg/L 이하의 투존 함유가 허용된다. 2007년에는 마침내 미국에서도 압생트 판매가 자유로워졌다.

레마르크의 ‘개선문’에는 파리의 카페 푸케(Fouquet’s)가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인 라비크와 조앙은 이 카페에서 처음 만나 압생트를 나누어 마신다. 푸케는 파리 샹젤리제에 실제로 있는 카페다. 화가들의 마음을 빼앗았던 압생트를 실제로 한번 마셔보는 건 어떨까.

글 : 이식 박사(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책임연구원)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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