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점심 메뉴는 매운 제육볶음. 많이 주기로 소문난 집이라 거하게 먹었다. 더부룩한 느낌이 들어서 청량음료도 한 잔. 식후에 커피 한 잔. 아 그런데 역시나, 역시나 또 뱃속이 요란하다.

“김 대리, 또 화장실 가는 거야?”
“네, 점심 먹은 게 아무래도…”
“그렇게 장이 안 좋아서 어째.”
“전 어려서부터 장이 안 좋았어요. 어이쿠, 실례할게요.”

나 김 대리의 장(腸)은 매일 이런 소리를 듣고 산다. 내가 장기들 중에 덩치로는 제일이지만, 솔직히 난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이다. 아니 세상 없이 둔감하더라도 ‘불량품’ 소리를 날마다 듣는다면 기분 좋을 리 없다. 포화 상태까지 잔뜩 먹고, 가스 유발하는 청량음료 마시고 그 뒤에 커피 세례까지 퍼부은 다음 장이 안 좋다고 탓을 하다니. 나는 밀려드는 음식물들을 처리하느라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다른 장기들마저 내가 일 처리 느리고 자리만 많이 차지한다고 비웃는 지경이다. 도대체 내 신세가 이게 뭔가. 위란 놈은 ‘난 최선을 다했어.’라며 나에게 음식물을 내려 보내지만 제대로 밑 작업이 되어 있을 리 없다. 이래저래 오늘도 나는 꾸륵거리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하다 안되면 설사로 밀어내거나 가스가 차면 방귀나 뿜어야지. 별수 없다.

“김 대리, 이제 괜찮아?”
“아직도 배가 빵빵한 게 속이 편하지 않네요.”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
“휴, 말 마세요. 제가 병원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는걸요. 과민성대장증후군은 병이 아니라며 그냥 운동 열심히 하고, 평소에 문제 일으키는 음식은 피하라는 식으로 의사들은 쉽게 말한다니까요. 병원 돌아다니다 도리어 우울증 생기기 십상이에요.”
“오래가는 걸 보면 과민성대장증후군이 아니라 다른 병일 수도 있잖아? 염증이 있거나, 요새는 대장암도 많다고 하니까 안심하는 차원에서라도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지.”
“저도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도 받아봤어요. 혹시 위에 문제가 있나 싶어 위장관 방사선검사, 내시경, X선 조영술부터 대변검사, 혈액검사, 대장경 검사, S자 결장경 검사까지 안 해본 게 없는데요. 다행히 병은 아니래요. 궤양성 대장염은 대부분 직장에 염증이 생기는데 설사 외에도 혈변이나 식욕 감퇴, 체중 감소 같은 증상이 있대요. 복통, 설사와 37.5도 이상의 미열이 있으면 장 결핵이나 궤양성 대장염, 종양 등 다른 병일 가능성이 있지만, 저 같은 증상은 전형적인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라네요. 그러니까 증후는 있지만 병은 아니라는 거죠.”

한숨 돌리고 나니까, 이 몸의 주인은 또 대장 탓을 하고 있다. 사실 이건 김 대리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마케팅팀의 이 대리도, 회계팀의 정 과장도, 아까 화장실에서 만난 인턴사원의 장도 나와 동병상련인 처지다. 감기 다음으로 흔한 병이 바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성인의 15~20%가 이 증상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모두가 장 탓이오.’ 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은 변비를, 어떤 사람은 설사를 하고, 또 어떤 이는 변비와 설사를 번갈아 하고, 방귀, 복부 팽만 등등 증상은 가지각색인데 뭉뚱그려서 다 장이 안 좋은 탓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는데 똑똑하다고 으스대는 뇌들이 연구해서 내놓은 답이라는 게 ‘모르겠다.’는 거다. 스트레스나 우유 달걀 고기처럼 소화가 잘 되고 찌꺼기가 남지 않는 음식 탓이 아닐까? 아니면 말고. 이런 식이다. 운동을 하세요. 소식하세요. 배를 따뜻하게 하세요. 스트레스를 줄이세요. 등등 이건 모든 건강 상담에 교과서 같은 답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도 지난번에 만난 의사는 좀 괜찮았다. 병도 아닌 걸 가지고 병원에 왔느냐고 핀잔을 주지도 않았고, 장이 안 좋다는 소리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고충을 아는 듯 김 대리에게 장의 기능을 믿고 맡겨보라는 얘기까지 했다. 그 의사가 내린 처방은 우리나라 성인은 유당분해효소가 부족한 경우가 많으니 우선 유제품 섭취를 줄여보라는 것이었다. 김 대리가 이거 하나는 잘 지켰다. 하지만 유제품 만이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 의사는 먹는 음식에 대해 일기를 써서 어떤 음식이 증상을 악화시켰는지 찾아내는 방법을 써보라고 했다. 김 대리가 오늘 제대로 일기를 쓴다면 매운 제육볶음, 청량음료, 커피가 모두 과민성대장증후군의 용의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일기를 믿다가는 큰 코 다친다. 지난번에 삼겹살과 맥주를 먹은 뒤로 크게 고생을 하고 나서 결심을 단단히 하고 음식 일기에 써두기에 이젠 안심이다 했더니, 2주가 지나지 않아 같은 메뉴를 또 들이부었다. 회식이란다. 그래도 음식 일기를 꾸준히 쓰는 것만은 칭찬해줄 일이다. 문제는 이렇게 일기를 계속 쓰다간 김 대리가 회사 근처에서 점심으로 먹을 게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나마 나 같은 처지의 장이 많다는 게 약간은 위안이 된다. 머지않아 나의 이 고통도 해결책이 나오리라 믿는다.

참, 이봐 주인. 혹시 자다가 복통 때문에 깰 정도로 배가 아프다면, 그건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아니라고. 그땐 얼른 병원에 날 데리고 가줘. 부탁해.

글 : 이소영 과학칼럼니스트


ndsl링크 <출처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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