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오~ 진실이시여! 리플리증후군


기말고사가 끝난 뒤로 태연의 일상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게으르다. 세수와 샤워는 물론 양치도 하지 않아 입에서 곰삭은 청국장 냄새가 나고, 방은 온갖 과자봉지들로 뒤덮인 쓰레기장에 가깝다. 

“방 좀 치우라고 했지! 바퀴벌레 사육이라도 할 참이냐, 어?” 

“아이, 왜 그러세요. 평균 90점 넘으면 무한자유를 주겠다고 하셨잖아요.” 

“그거야 뭐, 불가능할 줄 알고 약속한 거지. 암튼, 정말 90점 넘은 거 맞아? 만날 60점만 맞던 네가 고득점 딸로 거듭났다는 게 영 실감이 안 된단 말이야. 성적표는 언제 나오니?” 

그런데 ‘성적표’라는 단어에 순간 태연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러더니 자꾸만 손으로 입과 코를 만지작대고, 한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하더니, 계속해서 자세를 바꿔 앉는다. 

“딱 걸렸어. 성적표 나올 때까지 게으르게 한 번 살아보려고 거짓말한 거였구나!” 

“헉, 점쟁이 빤쓰라도 빌려 입으신 거예요? 죄송해요. 실은 말숙이가 리플리증후군이라는 걸 알려줬는데, ‘나는 90점이다, 틀림없이 90점일 것이다’라고 계속 생각을 하면 정말 그렇게 믿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번 해본 건데, 제 연기가 그렇게 형편없었어요?” 

“뭘 알려면 좀 제대로 알아라. 리플리증후군(Ripley Syndrome)은 ‘허구의 세계를 진짜로 믿어서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반복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로, 정신과적으로 보면 일종의 망상장애야. 성취욕은 아주 큰데 실제로 성취할 능력은 되지 않는 사람들이 열등감에 빠진 나머지,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하고 거짓으로 만든 지위나 신분 등을 진짜로 믿어버리는 거지. 네가 한 단순 자기암시와 망상장애는 전혀 다른 거라고! 게다가 얼굴을 만지고 자세를 바꾸는 것은 네가 거짓말을 할 때 나오는 딱 그 몸짓이란 말이다. 누굴 속이려고 들어, 이 녀석아!” 

“어쨌거나 리플리증후군에 걸려도 거짓말을 하는 건 맞네요. 그냥 거짓말과 정확히 뭐가 다른 거예요?” 

“보통 거짓말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숨기거나 책임을 피하고 싶어서 하게 되는데, 거짓말이 나쁘다는 걸 본인도 잘 알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불안감을 느끼게 된단다. 그래서 심장도 벌렁벌렁 뛰고 자기도 모르게 아까 네가 했던 것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거지. 반면에 리플리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자신이 하는 거짓말을 진짜로 믿어버려서 죄책감 같은 감정이 거의 없어요. 얼마 전에 세계 최고의 명문인 하버드대학교와 스탠퍼드대학교에 동시 입학했다고 거짓말을 해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여학생도 자신이 진실을 말했다고 철저하게 믿고 있었다는구나. 리플리증후군인 거지.” 

“그 얘기는 저도 들었어요. 그게 리플리증후군이었구나. 근데 리플리가 무슨 뜻이에요?” 

“뜻이라기 보단 소설 속 인물 이름이야. 미국 소설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955년 작 ‘재능 있는 리플리 씨’에 나오는 인물인데, 호텔 종업원으로 가난하게 살다가 우연히 알게 된 재벌 2세 친구를 죽이고는 완벽하게 그 친구 행세를 하는 사람이지. 소설 속 리플리는 실제로 자기가 재벌 2세라고 철석같이 믿고 산단다. 이 소설이 인기를 끌면서 리플리 같은 정신과적 증상에 관심이 집중됐고 ‘리플리증후군’이라는 이름이 생겨난 거지. 이후에도 리플리증후군을 소재로 한 영화는 계속 만들어졌는데 아빠와 비슷하게 생긴 ‘알랭 드롱’이 주연한 1960년 작 ‘태양은 가득히’나, 역시 아빠를 꼭 빼닮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의 2002년 작 ‘Catch Me If You Can’ 등이 그것이란다.” 

“만약 그들이 아빠를 닮지 않았다면 아빠는 거짓말쟁이일까요, 리플리증후군에 걸린 걸까요? 흠, 뜨끔 하는 표정을 보니 거짓말쟁이시군요. 암튼, 그럼 이 병은 어떻게 치료해야 해요?” 

“글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치료가 아주 어렵단다. 일단 현실을 인지하고 자신이 거짓말로 만들어 낸 허구의 존재처럼 대단하지도 멋있지도 않다는 걸 인정해야 치료를 시작할 수 있는데, 그게 정말 쉽지 않다는 구나. 현실을 깨닫는 순간 엄청난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대부분 다시 망상 속으로 도망가 버린다는 거야.” 

“휴, 좀 안쓰럽긴 하네요. 그럼 영 방법이 없는 거예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란다. 현실 속 자신도 충분히 소중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주변에서 끊임없이 관심과 사랑을 주는 거야. 현실의 내가 맘에 든다면 굳이 허구 속으로 숨을 필요가 없을 테니까 자연히 치료가 되겠지.” 

“그럼 저도 치료해 주세요. 현실 속 60점도 충분히 훌륭한 점수라고 느낄 수 있도록 ‘60점이나 맞다니 태연이 넌 정말 대단해!’라고 칭찬을 해달란 말이에요. 그럼 저도 아빠의 외모가 현실 속에서도 매력만점이라고 말해 드릴게요. 헤헤. 이 정도면 완전 공정한 거래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만….” 

“태연이, 너!!” 

글 : 김희정 과학칼럼니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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